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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6 02:36
집에서나 직장에서, 그리고 친구들끼리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나 출판물, 텔레비전에서도 갈수록 한 개인의 정신적 도덕적 자질을 묘사하지 않는 빈곤한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질들에 관하여 말할 줄 모른다면 눈이 멀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능력을 되찾으려면 말의 속도를 늦추고 옛말들이 다시 빛을 보게 해야 한다.
옛말 하나를 찾아내 보도록 하자. 옛 표현들 중 <고귀한 영혼> 같은 말을 하나 골라보자. 이 말을 다시 사용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도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있을까? 그 사람들과 동화되어 보고, 그들을 묘사해 보고, 편협한 영혼의 사람들과 구별해 보도록 하자.
고상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자신 속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의 자아와 관심거리에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책임질 수 있는 내적 에너지와 풍요로움을 지닌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고 몰두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관대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착하고 정직하긴 하지만 정신적 영역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이 최고이고 자신들의 종교가 최고라고 믿으며, 언제나 좋은 게 무엇이고 나쁜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일방적인 자기 관점에서 벗어날 줄을 모른다. 이와는 달리 지적으로 관대하고 정신적으로 열려 있고 자신의 우주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관점도 이해하는 능력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듯 자신을 상대적으로 바로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않으며 배울 줄 알고 감사할 줄 안다.
영혼이 가난하고 편협한 사람은 자신의 목표만을 바라본다. 정의와 자신의 이익을 혼동한다. 누군가 그의 욕망을 가로막는다면 그를 증오하고 욕하고 비방하고 그러기 위해 그 어떤 부당한 일, 그 어떤 사악한 일이라도 저지를 태세를 갖추고 있다. 고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지도, 경쟁자를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를 존중하고 그의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해 준다. 경쟁이 끝나면 분노를 잊고 마음속에 복수심을 키우지 않으며 용서한다.
자만심과 위엄이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만심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 위에 두는 것이다. 위엄은 어떤 성질이든 가치가 있고 보호되어야 함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엄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낮춰 비열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다를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고 비굴해지는 것조차도 참을 수 없어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들, 굴욕과 증오와 폭력 사이에서 겁을 먹고 동요하는 불안정한 인물들이 생각난다. 소련의 역사는 공포가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고귀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주변에 자유롭게 모이는 것을 원한다. 분명하게 자기 계획을 제시하고 개방적으로 반대 의견 듣기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고 설득하고 이끌어 나가면서 동의를 통해 지배한다. 그들 주변에는 신뢰감이 생겨난다. 놀이의 규칙이 명확하기 때문에 속임수나 함정 같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그런 규칙을 지키는 최초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비난할 줄 알고 상을 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을 줄 줄 안다. 이 모든 것은 내면적인 균형과 내적 조화로 전환되는 훈련과 연습을 요구한다.
영혼의 고귀함이라는 말은 강인함, 외로움과 역경 속에서 저항할 줄 아는 도덕적 용기,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힘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쯤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진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점 얼룩도 두려움도 없는 기사 이야기에나 나오는 인물들인지 자문해 볼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 사회 그 어느 계층에나 그들이 존재한다. 큰 권력과 경쟁이 있는 높은 곳에도 있다. 우리가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들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우리 삶이 즐거운 것은 다 그들 덕택이다.
- 프란체스코 알베로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