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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현실은 실리가 주류를 점하지만 역사는 늘 명분에 방점을 찍는다

댓글 7 추천 3 리트윗 0 조회 89 2012.10.13 11:19

 

 

 

-전하, 명길의 문서는(항복문서)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가셔야 할 길이옵니다.

김상헌이 국서를 찢어버리고 조아린다.

-먼저 신을 죽이시고 다시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굴욕적 운명을 앞두고 청의 칸 누루하치에게 전하려는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놓고 벌이는 논쟁이다. 김상헌은 통곡을 하면서 국서를 찢어버린다. 역사에서 명분이란 감히 임금에게 임금의 지시로 작성한 문서조차 '글'이 아니라고 말하게 한다. 이렇듯 우리 역사에서 보듯이 역사는 명분과 실리에 따라 각기 파벌을 이루면서 이합집산을 지속했다. 이때 주류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임금이 명분과 실리파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주류의 헤게모니가 갈리게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예조판서였던 청음 김상헌과 이조판서였던 지천 최명길은 척화파와 주화파를 대변하는 당대의 주류 엘리트였다. 당시 주류들은 청과의 전쟁을 불사하자는 척화파와 굴욕을 당하더라도 화친을 해야 한다은 주화파로 양분되었다. 외면상으로는 일단 실리를 견지한 주화파가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화파는 당장의 살 길을 찾느라 굴욕을 자초했다는 반대파들의 비난에 직면했다. 조선이 전쟁의 참화에서는 벗어났지만 청의 속국이 되면서 국가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실리를 쫓은 인조는 역사에서 영원히 죽었지만 명분을 주구한 김상헌은 영원히 살았다. 김상헌 이후 안동 김씨 가문(고려 이후 600년 동안 단 한 명의 과거 합격자도 배출하지 못했던)이 300여년 동안 일군 인재성적표는 15명의 정승, 6명의 대제학, 1명의 청백리, 9명의 장군, 3명의 왕비를 배출한 당대 최고의 명문가로 거듭났다.  

 

결국 주화파는 정치 현실에서는 주류가 되었지만 역사에서는 주류로 대접받지 못했다. 오히려 권력의 헤게모니에서 밀려난 척화파들이 주류로 평가되었다. 즉 척화파들은 권력 투쟁에서는 졌지만 주류 간의 선명성 경쟁에서는 늘 우위를 점했고, 결국 주류를 넘어선 주류가 되었다. 척화파인 김상헌은 자결을 시도하다 수포로 돌아가자 고향인 안동으로 은거했다. 반면 최명길은 영의정에 올랐다. 

항복이라는 치욕앞에서 항전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명분상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김상헌이 임금 앞에서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항복문서)를 찢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명분의 힘이었다. 그렇게 역사는 늘 명분을 정의의 편으로 간주했고 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위 학자나 관리가 죽으면 죽은 자에 대한 사후 평가인 졸기(卒記, 죽은 자에 대한 기록)가 실렸다. 김상헌의 졸기는 무려 6,915자에 이른다. 이는 이례적으로 아주 긴 졸기에 해당한다. 율곡이 3,444자, 이황이 2,526자다. 박세당, 정약용, 박지원같은 걸출한 실학자들에 대한 졸기는 아예 없다. 이들은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했기 때문이고 주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교훈은 당대에는 실리파가 주류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치 세계, 특히 선거에서는 언제나 명분의 힘이 우위에 있다. 더우기 그 명분은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대의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역사는 우리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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