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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8 12:01
아! 참 맛있다.
<우리 노짱님>
물에 담긴 보리는 며칠이 지나면 싹이 나기 시작한다. 싹이 난 보리는 햇볕 좋은날 며칠을 멍석에 늘어 말린다. 다음은 방앗간만 다녀오면 바로 엿질금으로 태어나게 된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엿질금 물을 부어 얼마간 삭힌 후 연한 불에 느긋하게 졸인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진갈색 조청으로 태어난다. 그 조청 엿을 만나려면많은 장작이 필요하다. 큰 가마솥 아궁이에 몇 번에 그득그득 장작을 넣어줘야 하고 질금 물을 장시간 주걱으로 저어가며 곁을 지켜야한다. 걸쭉하게 농도가 맞추어질 때 까지 한동안 정신을 모아야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청은 일년 내 식탁의 조미료로서 맛의 역할을 톡톡히 지켜준다.
그런데 그 귀하디귀한 조청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마을에서 조청호박강정과 장군차 강정이 배달되었던 것이다. 우선 그 이름부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하였다. 조청이라는 글자도 기억에서 멀어진지도 오래되었거니와 우선 호박과 차가 첨가된 강정을 만났다는 것이 더욱 구미를 당기게 하였다.
개봉하자마자 나의 기분은 어린아이마냥 가슴이 부풀었다. 뿐만 아니라 이내 다가서는 식탐은 마치 주린 배를 채우듯 급한 마음부터 앞섰다. 그 옛날의 맛을 찾아 한껏 향수와 미각에 빠져들었던 게다. 얼마를 먹었을까 입안이 부르튼 느낌을 받으면서 자리를 물렸으니 옛 맛을 그리워하고 즐겨 찾았던 평소의 내 마음이 오롯이 나타나기도 했다.
더구나 첨가물이 더욱 마음을 끌었다. 여름내 봉하 농부님들이 땀 흘려 경작한 호박의 분말이 강정의 빛깔을 아주 곱게 노오란 물감을 들여놓았었다. 산뜻하게 다가서는 강정에서 긴 장화를 신고 호수로 물을 주며 호박식구들에게 사랑을 나누던 건장한 남자들을 생각나게도 하고, 그에 힘입어 호박잎이 하늘을 받칠 듯 넓이를 더해가던 튼튼한 모습이 되살아 나기도한다. 인터넷을 통해 만날 때 마다 얼른 달려가 일손이 되어주지 못해 안타까움만 삭이던 일도 잊을 수 없다. 그 호박이 강정과 함께하였으니 반가움이 일수밖에, 누렁텡이 호박은 일반 가정에 죽이랑 부침개로 주로 쓰이는 격이었으니 오늘 만난 강정이 이색적일 수밖에 없다.
아! 참 맛있다. 정말 맛있다. 그 옛날 장작불 가마솥에 토담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주걱으로 저어면, ‘싸르륵 싸르륵 톡톡’ 뜨거움에 못 견뎌 튀어 오르던 그 튀긴 쌀 맛을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 만날 줄이야. 음미하고 또 음미해도 그때의 맛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당시에는 실은 거의 친 환경 유기농 쌀이었다. 이러니 봉하 오리쌀 맛과 조금도 다를 리 있겠는가. 형태도 똑 같거니와 조청이 풍기는 특유의 향이 나를 그 시절로 데려다 놓기에 충분하다. 아주 순한 단맛을 내는 그 단백함이 방부재와 설탕이 가미된 현재의 물엿과는 비교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쌀 맛의 부드러움을 위해 과거에 한번 찐 찐쌀과는 달리 세 번을 쪄 말린 찐쌀이라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그때의 맛보다 연하고 더 바싹함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모양새 또한 이제는 기계로 찍어내니 과거 가마솥 뚜껑에서 만들어내던 모습과 같을 수야 없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들의 칼로 잘라내던 크기의 고르기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느낌도 든다. 반듯반듯한 것은 조상차례 상에, 조금 더 나은 것은 손님상에, 모서리 것은 우리들 차지였다. 날씨가 추워야 엿이 굳어지면서 잘 붙으므로 밤에 만들 때가 많았다. 여러 솥뚜껑과 밥상에 버무려 펴둔 강정이 굳을 때까지 섣달의 뒤뜰은 어찌 그리 춥던지. 부스러기들을 받아먹기 위해 우리 형제들은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그런 추억을 더듬으며 2킬로그램의 강정을 푸짐하게 펼쳐놓고 두 끼의 끼니도 그른 채 입천장이 헐도록 먹었다. 마치 이기회가 아니면 다시 못 먹을 듯이... 더구나 과거에 없었던 천연향과 단맛을 내는 호박이 큰 미각을 돋구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모두가 친환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화학약품과 썩은 물이 봉하에 그대로 잔재해 있었다면 어찌 이런 맛을 기대할 수 있으랴. 그동안 쌓인 오염물질들을 트럭으로 수십 수백 톤을 걷어내고 정화한 탓에 오늘의 강정을 얻을 수 있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이 땅 곳곳에 우리는 참 많은 산업쓰레기들을 만들어내었다. 한적했던 봉하마을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통령이 친환경농법을 마련하고자 했을 때는 이미 축산 폐수와 각종 폐기물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미쳐 그 정도까지 생각 못했던 대통령도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새로운 물길을 만들고 그 물길로 황폐화된 흙을 정화시키기까지는 주민들과의 단합된 힘없이는 불가능하였다. 결국 대통령은 죽었던 물과 흙을 살려내었고 오리농군들과 함께 이리도 고소한 강정을 만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내내 고소한 향속에서 어린 날의 고향소식을 듣기도하고 봉하마을 오리들의 삶도 만난다. 여름내 강한 잡초들을 뿌리 채 먹으며 갖은 해충들을 씨알도 없이 먹어치웠을 녀석들의 부지런함도 이 맛에 다 들어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논길을 달리며 누구 던 벼를 해치는 놈들은 한 점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노심초사 다짐하며 감시와 노동을 아끼지 않았을 그들의 모습도 눈에 삼삼하다. 얼핏 보면 미끄럼 타듯 유유자적 노니는 것 같지만 실은 오리들의 몫은 대단하다. 잡초와 해충제거에는 이들을 따라올 명수들이 잘 없다할 만큼 우리 농촌지킴이 제 1호 농군이라 불러도 아깝지 않을 녀석들이다. 빠르기도 이들을 따라잡을 이도 잘 없지 싶다. 잠시도 쉬지 않고 소임을 다하는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보면 볼수록 기특하기만 하다. 더러 지쳐 꾀를 부릴 만도한데 한 치도 그런 모습이 없다. 녀석들의 부지런함이 이처럼 살아있는 맛을 나에게 보내주었던 게다.
내 입안의 부스럼은 벌써 며칠 째이다. 짠 것 매운 것 먹을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강정을 내 곁에서 물리지 못하고 있다. 허기야 수십 년 만에 만난 맛이니 썰렁 별나게 식탐에 젖어본들 어떠리! 죽었던 땅이 소생해 지난날의 환경을 오롯이 담아 청정한 옛 맛으로 돌아온 이 맛을 한껏 누리고 싶은 마음을 누가 막을 것인가.
아! 참 맛있다 정말 맛있다. 우리 집안은 어느새 고소한 향으로 가득 찬 공기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