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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10:07
ㆍ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1917~2012)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이 지난 1일(현지시간) 폐렴으로 영국 런던에서 별세했다고 유족들이 밝혔다. 향년 95세. 홉스봄은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이 진행된 ‘장기(長期) 19세기’를 탐구한 명저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격변의 ‘단기 20세기’를 관찰자로서 적은 <극단의 시대>를 비롯한 3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냉전 이후 자본주의의 독주 속에서도 공정사회를 만들기 위한 이상으로서 급진적 공산주의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학자였다.
2002년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 적었듯 홉스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별스럽고 지독한 시기”를 직접 살아낸 이였다. 금발머리에 깡마르고 내성적인 소년 홉스봄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가족과 함께 당시 유럽 지식인의 거점인 오스트리아 빈에 정착했지만 대공황 속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독일 베를린 친척에게 맡겨졌다. 바이마르공화국이 저물어가던 이곳에서 파시즘과 나치당의 부상을 목격한 소년은 14세에 공산주의 모임에 가입해 선전물을 제작해 뿌렸다. 홉스봄은 “누구든 아돌프 히틀러의 부상을 직접 목격했다면 정치관에 영향을 받게 된다. 그 당시의 소년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 19세기 탐구 대표 3부작
혁명·자본·제국의 시대서
인간 변화·발전 파헤쳐
(중략)
많은 동료학자들과 달리 홉스봄은 소련이 1956년 헝가리 봉기와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을 유혈진압하고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점으로 옛 소련 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통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전체주의로서의 공산주의를 옹호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1994년 BBC방송 인터뷰에서 그는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수백만명의 시민이 사망했더라도 진정한 공산사회 건설로 이어졌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켰다. 저명한 사학자 토니 주트는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홉스봄은 이 같은 고집 때문에 뉘우치지 않는 공산주의 사학자라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다”며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한 평가”라고 지적했다.
재즈광이기도 했던 홉스봄은 1989년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재즈 신>이라는 저서도 냈다. 유족으로는 1962년 결혼한 부인 마를렌 슈바르츠와 자녀 2명, 손자 7명, 증손자 1명이 있다.(경향신문)
<단지언니생각>
1)대공황(1929 ~ )시기에 부모를 다 여의었으면 10대 후반~20대 후반기 일때인데
2)예민한 사춘기에 공부에 전념해 세기적인 석학이 되었군요
3)마르크시즘을 신봉한다면 공산주의자 입니다. 시회주의자이며...
4)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진단한 분이군요.
5)위에 내용 중에 1994년 영국의 BBC 방송 인터뷰에서 "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6)수백만명의 시민이 사망했더라도 진정한 공산사회 건설로 이어졌다면
7)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 말에
8)꾼애 애비와 꾼애 등 박정희주의자가 생각나더군요
9)다만, 에릭 홉스봄 석학이 설파한 의미와 박정희 쿠데타의 당위성과는
10)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1)석학의 의미는 진정한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12)되겠지요. 왜냐하면 자본주의 한계와 모순이 큰 병폐로 이미 드러났으니까요
13)박정희주의는 결과적으로 성공한(?) 목적이-객관적 진실 여부는 의문으로 남겨둔 채-
14)아무리 불의한 수단도 정당화 시킨다는 것이 되니까요 차이가 있다고 볼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