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통과 공감이란 개념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소통과 공감의 실천적 요소인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기득권의 허위의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든, 재능이든, 아님 다른 달란트건 가진 자가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허영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경우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란 윤리적 행위에 속한다. 또 윤리란 자발적으로 구현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헌데 문제는 소통과 공감을 시대의 화두로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단지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소통과 공감의 시대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는 소통과 공감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소통과 공감은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나 의식, 의지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오직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본성에 충실하다는 것은 의식하고, 의지를 가지고 목표 지향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 내재되고 체화된 본성일 때에만 가능한 세계인 것이다.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은 어느 순간 우리를 지치게 하고 무디게 만든다. 해서 지속 가능한 소통과 공감의 세계를 꿈꾼다면 자신의 삶과 자신의 내면을 더 치열하게 성찰해야 한다. 나 스스로가 타인과 공감하며 공존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본성에 부합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때까지 말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소통과 공감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세계로 깊숙히 진입할 것이다.
정치의 계절, 너도 나도 소통과 공감을 이야기 하고 있다. TV에선 설악산에 가을 단풍이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자연이야말로 소통과 공감의 본질을 가르쳐준다. 자연에서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