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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5 00:18
누가 뭐라고 해도 21세기는 매스 미디어의 시대다.
신문에서 TV, 인터넷과 SNS까지 인류는 매스 미디어에 포위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1984》다.
조지 오웰은 미래 세계를 모든 매체와 공권력을 동원한 권력(빅 브라더)이 철저한 감시와 끊임없는 세뇌를 통해 인식과 행동을 조정하고, 정보와 사실 조작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감옥처럼 그렸다.
그에게는 국민을 감시하는 권력이 좌익이든 우익이든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구글의 회장이 인공위성에 의해 감시되는 세상에는 개인적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한 처럼, 오웰이 그린 미래는 감시하고 조정하고 세뇌하는 빅 브라더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오웰의 감시문화는 미완성 상태이고, 어느 시대나 대항권력이 존재하며, 소비적 자본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의 확장에 의해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겠다.
반면에 헉슬리가 그린 미래는 자본과 기술문명이 만들어낸 지배적 문화가 스트립쇼나 마약 파티와 같이 저속해져 인간이 욕망과 쾌락에 지배당하는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됐다.
헉슬리는 첨단 테크놀로지 자체에 내재된 본질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 황폐화가 의심과 증오로 가득한 적(전체주의)보다는, 쿨하고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적(쇼 비즈니스)으로 인해 야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봤다.
선정성과 상업성이 넘쳐나는 작금의 현실처럼, 헉슬리식 예언에서는 빅 브라더가 자기 뜻대로 우리를 감시하고 조정하지 않고, 쇼 비즈니스로 무장된 기술문명의 첨병들에 우리 스스로가 자청해서 다가가 부지불식간에 길들여진다고 경고했다.
닐 포스트만은 헉슬리가 예언한 것처럼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가 극성에 이른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제 분명히 안다.
두 소설가의 예언 중 어느 것이 지금의 현실과 유사한지.
중립적이라고 알고 있었던 과학기술과 매스 미디어가 자본과 권력 지향적이며 특정 이념에 편향적이라는 것을.
이 땅의 우파가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라는 최적의 기후조건에서 신문과 TV와 인터넷매체가 만들어내는 세상이란 기득권에 유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본과 권력이 제공하는 광고를 통해 돌아가는 신문과 TV와 인터넷매체에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없고, 그들이 전달하는 정보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단단한 의식과 이념이란 존재하기 힘들다.
우리는 신문과 방송, 인터넷매체가 전해주는 보도와 뉴스와 정보에 너무나 익숙해져 그들이 제공하는 내용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에 길들여져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집단적 언어와 과격한 표현에 지배된 개념과 팬덤 사이에서 판단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이제 자유세계의 지도자는 신문을 읽고 TV를 보며 인터넷매체에 접속하는 과정의 결과에 의해 선출된다.
누가 매스 미디어와 등지지 않고 가장 쿨(모호한 표현과 다양한 이미지가 핵심이다)하게 접근하는 정치 마케팅을 잘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되었다.
게다가 세상이 디지털 시대로 접어 듬에 따라 이런 경향은 갈수록 강화되고 쉽게 달아올라 쉽게 방출하는 표피적인 흥미를 유발하는 것들만 복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0과 1이 만들어내는 디지털 세상에선 광속의 스피드가 이미지의 잔상들로 차가운 이성과 사고의 노력들을 간단하게 대체한다.
특별한 쇼가 매스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마다 여론은 요동치고 지지율은 등락을 거듭한다.
여론이란 불연속적인 숫자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이로써 세상만사가 쇼 비즈니스로 통하게 됐다(There's No Business But Show Business.).
모든 것은 종이와 스크린을 통해야만 하고 그들이 전달하는 카메라의 각도와 편집기술의 능숙함에 따라 거대한 지적사기도 얼마든지 가능한 세상이 됐다.
허구가 사실을 위협하고, 진실이란 가득한 안개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불빛만큼 파편적이고 한없이 위태롭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매스 미디어가 전해주는 것들에 대한 지적검증부대가 없다.
진실을 걸러내는 이성과 사고의 필터에 모자이크처럼 자리한 이미지들이 초신성의 폭발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수동적인 정보 습득에 길든 우리의 무지는 언제든지 바로 잡을 수 있지만, 만에 하나 무지 자체를 자신의 지식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20년에 월터 리프먼은 “거짓을 간파하는 수단이 없는 사회에는 자유도 없다”고 했다.
2012년 대한민국의 거대 매스 미디어들은 박근혜 후보와 안철수 후보를 문재인 후보보다 더 많이 노출시키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역사인식이라고 둘러대고 있고, 매스 미디어들은 이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역사인식에 전향적 자세를 보여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어떤 신문의 논설의원이란 작자는 박정희 시대가 압축 성장을 위한 독재였다고 떳떳하게 말하라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한다.
안철수 후보는 휴브리스(자신의 성공 경험을 과신해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이 해왔던 방법을 절대적 진리로 착각해 실패하는 경우를 뜻하는, 토인비가 사용한 역사 해석학적 용어)적 환상에 빠져 시대가 자신을 호출한 것이라며 메시아적 행보를 보여주고 있고 매스 미디어는 이를 착실히 뒤따르며 대선 구도를 2파전 양상으로 몰고 가려 한다.
미래를 논하자며 현재를 단죄하고 과거를 부정하더니만 대한민국을 이런 수렁 속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을 과거에서 불러내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한다.
민주주의를 억합하고 경제민주화를 좌절시킨 유신의 망령도 안 되지만, IMF의 첨병이란 더더욱 안 된다.
진보 매체와 방송는 유신 망령은 논하지만, IMF의 첨병에 대해서는 간단히 다룬다.
보수 매체와 방송은 IMF의 첨병에 대해서는 논하지만, 유신 망령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왜곡한다.
그러면서도 양 진영의 매스 미디어는 정체도 없는 '친노'를 외치며, 참여정부의 실정을 부각하고 민주통합당의 무능을 질타한다.
그런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왜 부패 공화국이 됐으며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건너뛴다.
돌아보라, 대한민국 역사에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제대로 단죄되고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주어졌는지?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잘못된 것을 덮고 넘어간 것이 지금의 현실을 초래하지 않았는지?
현재는 과거의 사건들이 만들어낸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사건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단절된 시간이란 없고, 역사에서 배울 것이란 바로 이것이 그 처음이고 끝이다.
이제 두 후보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정은 매스 미디어들이 할 것이므로.
그 태생적 본질이 권력과 자본의 광고에 의해 움직이고 그에 편향된 기술로 이루어진 매스 미디어를 보면 미래의 이익마저 독점하려는 현재의 기득권이 원하는 18대 대선의 구도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