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열정적인 저술 활동과 페르낭 브로델 센터 운영을 통해 사회학 내에 세계체제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전문 학술지<리뷰>가 발간되고, 사회학회 내에 '세계체제 정치경제학'(PEWS) 분과가 만들어졌으니 이제 세계체제론은 당당하게 사회학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월러스틴이 평생 추구해온 것은 사회학을 넘어서고, 분과화를 극복하여 새로운 역사적 사회과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1974년 그가 대표 저작인 <근대세계체제> 제 1권이 발간되었을 때만 해도, ‘월러스틴 류’ 혹은 세계체제론은 낯설고, 주변적인 것이었다. 1970년대는 여전히 구조기능주의의 시대였다. 전성기를 지나긴 했지만, 구조기능주의가 사회과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다. 세계체제론은 사회학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구조기능주의의 이론화 및 방법론 모두에 대한 저항이었다.
구조기능주의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그래서 탈역사적 이론을 지향한다. 반면 세계체제론은 사회현상의 역사성에 천착하며, 역사의 이론화를 추구한다. 방법론적으로 구조기능주의는 실증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사회현상의 계량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통계적 방법에 매몰되곤 한다. 이에 비해 세계체제론은 역사적 방법론을 추구하고, 사회현상의 의미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구조와 장기적 시간에 대한 세계체제론의 관심을 고려할 때, 문과대 60주년을 기념해서 한국을 방문한 월러스틴 교수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북핵 ‘사건’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은 꽤나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월러스틴은 1970년대 이래 진행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라는 큰 주제 속에서 부차적으로 북한의 핵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인 올 여름, 진보적 학술지인 <뉴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에 기고한 글에서 월러스틴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실패가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을 막아보려는 네오콘과 조지 W. 부시의 헛된 노력이라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라크에서 발목을 잡혀 난처한 상황에 빠졌고, 북한은 이라크가 공격당한 것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게 됐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분석이었다.
월러스틴의 거시적 접근이 때로 놀랄 만큼 정확한 분석 혹은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계체제론이 가진 시간틀의 다중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하나의 사건을 단기적 맥락에서 뿐 아니라, 중기적 주기 속에서 바라보고, 나아가 장기적 경향 속에서 논리적으로 해석해내는 것이다. 미국에 의한 이라크 공격은 사담 후세인의 몰락과 미군에 의한 신속한 점령으로 얼핏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의 쇠락 곡선 속에서 보면 하향 기울기를 더욱 가파르게 만드는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것이 월러스틴의 분석이다. 그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변화를 지적하면서, 북한의 핵 보유가 보수화되는 일본의 군비 확장과 핵 무장을 가속화할 것으로 본다. 두렵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핵 확산은 현실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40여 권의 저작을 통해 월러스틴은 사회발전론, 비교사회학, 역사사회학, 서양근대사, 국제정치학 등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면상,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가지는 의미를 네 가지로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그의 저작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자본주의 세계가 역사적 구성물임을 깨우쳐 준다. 우리들은 현재의 사회 체계를 영원하거나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체제가 16세기에 태동해 긴 과정을 거쳐 팽창하고, 성장해온 역사적 구조임을 보여준다. 유럽에서 탄생해서 지리적 팽창과 사회적 포섭을 통해 발전해온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내적 모순에 의해 위기에 처하리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자본주의를 탈신비화시켰다.
둘째, 앞에서 지적했듯 세계체제론은 주류 사회과학과는 달리 시간의 변화를 분석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브로델의 영향을 받은 월러스틴에 있어 시간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의 분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다중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장기지속(long duree)인데,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구조적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짧은 시간틀로 월러스틴은 헤게모니 체제의 부침이나 약 40~60년을 단위로 하는 콘드라티에프 주기 등을 활용한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 살펴본 봐와 같이, 시간의 중층성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분석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월러스틴에게 현 국면은 단순히 미국 헤게모니 체제의 몰락기만은 아니다. 더 긴 시간에서 보면,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으로는 값싼 노동력 혹은 반-프로레타리아트(semi-proletariat)의 지리적-사회적 고갈, 진보 이데올로기와 정당성의 위기, 그리고 생태적 위기의 심화에 따른 이윤율의 저하 등이 대표적이다.
셋째, 월러스틴은 기존의 서구 사회과학이 가지고 있던 진보나 발전의 필연성에 대해 근본적인 전복을 시도했다. 그것이 맑스주의이건 자유주의이건 근대성 기획들은 진보를 단선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역사의 단계를 물화하고, 진보의 필연성을 의심치 않으며, 국가 주도적 사회혁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다른 한편 서구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진된 발전주의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그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근대화론으로 불리는 기능주의적 발전론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역사의 비가역성과 진보의 불확정성을 명확히 한다.
이와 관련해 월러스틴은 ‘현 시점’에서 역사적 주체로서의 행위자를 강조한다. 지금이 미국 헤게모니 체제의 쇠퇴기이자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시대라면, 작은 균열들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월러스틴은 행위자들이 벌이는 반(反)체제운동들이 향후 새로운 사회체제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미래는 불확실하다. 현재의 기득권층 역시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새로운 역사적 사회과학 모색에 대한 열정이다.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나 <사회과학의 개방>에서 월러스틴은 기존 사회과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기존 사회과학의 분과화, 사회과학의 유럽중심주의(와 기만적 보편주의 표방),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의 분리,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부적절한 분석 단위 등이 문제점들의 목록이다. 월러스틴은 사회과학의 재구조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학제적 연구, 교수들을 복수의 학과에 공동 임명하는 것, 대학원생들을 여러 학과에서 강의를 듣고 연구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제안은 한국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철규/ 문과대 교수· 비교사회학
가나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