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을 꿈꾸는 者에게 권력의지 유무를 묻는 일은 예의가 아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 善 의지로서의 권력의지는 클수록 사회에 유용하다. 우리 진용 선수들의 정치철학이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더불어 국민들의 수준도, 나라의 수준도 품격도 안심이다. 그런데 박근혜? 화제를 돌리자!
내가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더 엄밀하게 말해서는 힘의 의지)를 읽고 느낀 소회는 이 책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인 ‘종의 기원’의 결정판이라는 것이었다. 권력에의 의지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퍼뜨리고 주위를 다스리고자 하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본능과 같은 것, 한마디로 생의 충동이기 때문이다. 이번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모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일컬어 권력의지가 박약하여 박근혜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고 평가절하 했다. 권력의지라는 측면에서 또 다른 유력후보인 안철수 역시 정치적 근육(권력의지)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연 그럴까?
문재인은 이에 대해 ‘권력의지가 개인의 야망을 실현하는 것이라면 저에겐 없다. 그러나 권력의지가 시대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다는 의지라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해 있다. 권력의지는 국민들이 위임해주는 것이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저의 권력의지는 개인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의지가 아니라 소중하게 가꿔서 국민들에게 되돌려드리기 위한 의지다.’라고 답했다. 권력의지를 공적인 소명의식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안철수 역시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인용하며 자신은 공적 영역의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하며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음을 내비쳤고, 성취욕구나 목적의식, 명예욕과 내적 신념의 덕목으로 권력의지를 대변한 것이다. 또한 ‘크로마뇽인의 벽화처럼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바람이라고 밝혔다.
바로 니체에게 이 세상 자체는 각 생명체들의 권력을 향한 의지들이 부딪치는 권력을 향한 의지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는 개인에게 특히 정치인에게 권력의지의 유무를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특히 인간이라면 니체가 주지한 힘의 의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업 정치인일 경우는 더하다. 그들에겐 권력의지가 자신의 존재와 실존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권력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는 데서 나아가 권력을 정치권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순간, 정치판에는 어떻게든 권력만을 획득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즘만이 득세하고 인간을 위하는 덕목은 퇴색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니체의 주장이 득세하면 히틀러를, 그것이 박정희에 이르면 유신체제와 독재를 불러오는 것이다.
자, 판단의 근거는 이렇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2013년 이 나라의 어떤 대통령과 더불어 동시대를 호흡하며 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