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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03:58
))박근혜 "인혁당 대법 판결은 2개" 헌정무시
김창종 헌법재판관 후보자 "판결2개 있을 수 없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10일 유신시절 대표적 공안사건인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면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답을 한번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박 후보는 이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이같이 말한 뒤 “똑같은 대법원에서 (판결이) 다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라며 피해 유족에 대한 추가적 사과나 새롭게 변화한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박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은 삼권분립 등 헌정절차가 정지된 유신 때 이뤄진 유죄 판결과 민주화 이후 사법부가 무죄로 교정한 판결의 효력을 동일시한 것이다. 이미 역사적, 사법적으로 판단이 내려진 사안까지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도예종씨 등을 구속기소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이듬해 4월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지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되면서 유신시절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을 통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혔고, 이에 따라 2005년 12월 법원이 이 사건의 재심을 수용했다.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이미 형이 집행된 피고인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박 후보는 또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 평가에 대해서도 “몇 십년 전 역사라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지 않겠는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유신에 대해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면서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창종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판결이 2가지가 존재할 수 있느냐’는 민주통합당 박영선 의원의 질문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최종적인 견해가 최종결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정성호 대변인은 “박 후보가 역사왜곡에 이어 판결왜곡마저 서슴지 않았다”면서 “법질서를 세우자며 위헌적인 유신을 옹호하고, 국민통합을 말하며 사법적 판단까지 부정하는 사람이 과연 대통령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1면)
))강기갑 "진보정당 역사에 죄인 ... 농부로 귀향"
ㆍ사실상 정계 은퇴
“진보는 더 큰 공동의 선과 더 많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는 희생과….”
통합진보당 강기갑 대표(59)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10일 국회에서 대표직을 사퇴하고 탈당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진보정당과 함께한 지난 9년간을 회상하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 대표는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며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당원 동지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지난날을 기억하며 이제 민주노동당에서 이어져온 통합진보당 당적을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의 고난은 지난 4·11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시작됐다. 편하게 쉴 틈도 없었다. 당이 비례대표 부정·부실 경선 사태로 신주류 쇄신파와 구주류 당권파로 나뉘어 대립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떠맡았다. 이후 대표를 맡아 넉 달 넘게 동분서주하며 중재해왔다. 그러나 마지막 절충안으로 구주류 당권파에게 이석기·김재연 의원 사퇴 등을 촉구했지만 당권파가 거부하자 이날 최종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강 대표는 농부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보내주신 애정에 보답하지 못하고 진보정당 역사에 죄인이 된 저는 속죄의 길을 가고자 한다”며 “이제 흙과 가족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고향(경남 사천)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정치 일선으로부터 사실상 은퇴에 가까운 후퇴를 선언한 것이다. 떠나는 길에서도 그는 신주류 쇄신파와 당권파 양쪽에 당부를 잊지 않았다. 쇄신파에게는 “헌신하는 정치만이 진보정치를 국민의 마음 속에 다시 뿌리내리게 할 것이고, 그래야만 국민으로부터 용서받을 것”이라고 했다. 당권파에게는 “이제부터라도 서로에 대한 대립과 반목을 내려놔야 한다”며 “언젠가는 진보의 역사 속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고 말했다.
그의 본업은 농부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부의장으로 농민운동을 하다가 2004년 전농의 정치세력화 결정에 따라 민노당에 입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런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18대 총선 때였다. 이명박 대통령 측근인 이방호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이기고 경남 사천에서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흰 도포에 수염을 기르고 등장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마법사 ‘간달프’와 비슷하다고 해 ‘강달프’라는 애칭을 얻었다. 그는 2009년 1월에는 미디어법 날치기를 막느라 본회의장 앞 점거농성을 하던 민노당원들을 국회 경위들이 해산시키며 부상을 입히자 박계동 당시 국회 사무총장을 찾아가 책상 위에서 뛰어올랐다. 이때 찍힌 사진으로 ‘공중부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민노당과 그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또한 굳혔다.
그는 어려울 때 구원투수로 나섰고, 누구보다 활발히 의정활동을 했다. 17대 국회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논의가 이뤄지자 홀로 69일간 단식했다. 2008년 민노당 분당 사태 때에도 대표를 맡아 당을 수습했다. 취임 1년여 만에 당 지지율을 10%대까지 끌어올려 ‘화합형’ 대표로 평가를 받았다.
강 대표는 회견 뒤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도포 자락을 걷은 강 대표는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아쉬움 때문인지 그는 한참 일어나지 않았다.(경향신문4면)
<단지언니생각>
1)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근혜의 2개의 판결이란? 애비때 한 판결(1975년)과,
2)노통때(2007년)한 판결에 대해 각각 2개의 판결이 존재한다는 시각임.
3)사실상 꾼애는 애비때 한 판결이 정당하며, 노통때 다시 한 판결은 인정하지 않겠지요
4)꾼애에게 100번 물어봐야 항상 꼭 같은 대답입니다. 애비가 자행한 역사의 이단이
5)바로 꾼애가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이며 유전자이니까요
6)반면에,
7)아래 눈물을 흘리며 다시 농부로 돌아가는 강기갑 대표의 심정은
8)이 나라 정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슬프고 불행한 단면입니다.
9)정의란? 역사의 질곡 속에서 견디다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까요?
**만약 꾼애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애비와 마찬가지로 총칼만 안든 쿠데타가 될 것이며
애비의 반란까지 소급해 정당화 시켜주는 비참한 꼴이 되겠지요. 그리고 이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 할 자질이 안되는 후진국가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며 ...
(참고자료)
▲ 인혁당 사건은
간첩단 조작… 판결 18시간 만에 8명 사형
유신정권 아래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억울하게 사형집행된 분들: 도예종·여정남·김용원·이수병·하재완·서도원·송상진·우홍선 )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오른쪽)가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황우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서성일 기자 c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