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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9 13:17
1. 노마드의 이해
인터넷의 발전과 함께 ‘노마드’, ‘노마디즘’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한 유행어가 되었다. 번역하자면, ‘유목’, ‘유목주의’ 정도가 될 이 단어들이 유행을 타게 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세계자본주의 단계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대략 1990년대부터 다국적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하의 ‘보편적 삶의 조건’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이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이 시대에 군림하고 있다.
아예 인류사를 유목/정주라는 개념 틀로 재 기술함으로써 이러한 현 시대적 조건을 ‘오래된 미래’로 사유하려는 경향도 대두한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는 그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만하다. ‘잡노마드’니 ‘디지털 노마드’니 하는 신조어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생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경향성을 ‘경제적 노마디즘’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제적 노마디즘의 우상은 징기스칸인 바, 오늘날 그 정신적 후예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본의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권력계급으로서의 ‘하이퍼노마드’이든, 새로운 하층민으로서의 ‘인프라노마드’이든.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노마디즘에 앞서서 反파시즘적 삶의 양식을 기치로 내걸었던 또 다른 노마디즘도 있었으니 그것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돌로지, 곧 노마드의 철학이다. 국내에서는 이진경의 저작 <노마디즘>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 철학적 노마디즘은, 그 주된 전거가 되는 <천 개의 고원>이 1980년에 출간된 만큼 경제적 노마디즘과는 종류와 계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에 따르면, 철학적 노마디즘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을 가리킨다. ‘앉아서 하는 유목’이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동종일 리는 없다. 애당초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증적 교란과 그로부터의 탈주를 기획했던 만큼 철학적 노마디즘과 경제적 노마디즘은 동일한 이름으로만 불릴 뿐 내용물은 전혀 상반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없이 통칭어로서 ‘노마디즘’ ‘유목주의’란 말이 남용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노마드에 대한 정의는 이쯤에서 그치고 노마드의 우상이라는 칭기스칸으로 돌아가 보자.
2. 노마드의 우상 칭기스칸
칭기스칸은 속도, 기술, 정보를 그 어떤 가치보다 중시했다. 몽골인들은 부족 전체 100만 정도의 인구에서 10만 명 남짓의 병사로 동쪽으로는 고려에서 중국, 베트남, 인도, 터키,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처 서쪽으로는 시베리아와 유럽, 스페인, 일부는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 2억 명의 인구와 777만 평방미터의 땅을 정복했다. 348 만 평방미터의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나폴레옹(115만), 히틀러(219만) 합친 것보다 컸다. 칭기스칸은 정복지의 기술자를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그 어떤 제왕보다 기술자를 존중했다. 칭기스칸의 군대는 역사상 그 어떤 군대보다 더 먼거리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움직였으며, 전 세계(6,800Km)에 깔린 역참과 대상으로 조직된 네트워크는 제국의 모든 정보를 장악했다. 그들의 조직은 변형과 변신이 자유롭고 철저하게 실력위주로 운영되는 유연한 매트릭스적 천호제(千戶制)라는 인력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칭기스칸의 제국 경영에서 특히 빛나는 대목은 당시 몽골 제국이 혼혈잡종 사회로 신분의 수직상승이 오직 실력으로만 판가름하는 완벽하게 열린 사회였다는 점이다. 칭기스칸은 수많은 이질적 민족과 종교,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의 사람들을 하나의 팍스 몰골리나 내부로 수용하면서 아무도 차별하지 않았다. 다양성의 수용과 균형, 이것이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칭기스칸의 수용정책이었다. 대신 그들은 정복국가의 정치적 기득권층은 모조리 죽였다. 그것은 그들에게 반기를 들 세력의 뿌리 뽑는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몽골제국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라는 심리전의 조성이 목표였다.
칭기스칸이 지배했던 암흑의 중세에 머물러 있던 12세기~13세기의 130여 년 동안 서구는 대륙과 국경을 넘어 질풍노도처럼 길과 사람과 물자와 문명을 왕성하게 교류시킨 몽골제국의 유목적 기상인 노마드의 출현에 의해 비로소 어두웠던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유럽은 이 혐오스러운 노마드인 칭기스칸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 노력은 중세 이후 서양사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