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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18:02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한 인간의 존재가 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내게 천둥 같은 영감을 안긴 장 그르니에의 ‘섬’의 에필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문장을 나는 내 경험을 빗대 이렇게 써보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국궁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회원들은 활을 잘 쏘는 그를 사범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즐기는 유일한 운동인 궁술을 연마할 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를 가르친 사범은 한 화살을 두 번 쏠 수 없으며, 활을 잘 쏘는 법을 알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과녁을 맞춘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우리 자신이 화살이 되고 활이 되고 목표점이 될 때까지 수백 수천 번을 다시 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의 에너지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끌어,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그것'이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활시위를 놓게 되는 것이다. 즉 활대와 활시위와 내 손과 호흡이 하나인 상태가 될 때까지 끊임없는 연습으로 활시위를 당긴다는 것이다. 진정한 명인이란 어느 순간 내가 화살을 쏜다는 행위 자체도 잊어버리는 상태가 될 때, 활대를 떠난 화살이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닌 채 목표를 날아가는 상황에 이른 궁사를 명궁이라 한다. 즉, 활과 화살과 과녁이 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닌 하나를 이룬 궁사가 명궁인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명인이란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이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같은 존재일 때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 명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만들어진 습관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변화가 지나가 버린 것이라면,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다. 게다가 습관은 그것이 습관인 한에서 그리고 그 본질 자체에 의해 그것을 낳는 변화에만 관계될 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그런 변화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에 의해 습관이냐 아니냐가 가려진다. 습관은 따라서 어떤 상태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향이자 능력이기도 하다.
-<습관에 대하여>- 라베송
실증주의 철학자 베르그송의 스승이었던 라베송의 말이다. 그는 습관은 그것을 낳은 변화를 넘어서 존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변화란 외부 세계를 가리킨다. 세계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마땅히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의 뇌 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가장 심층에 있는 오래된 뇌, 중간 부분의 중간 뇌, 그리고 가장 최근의 새로운 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마치 지질학에서 다루는 지층처럼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을 측정하는 기능성자기공명 기법을 통해 과학자들은 각각의 뇌 층이 담당하는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오래된 뇌가 행동을 담당하고, 중간 뇌가 정서를 담당하고, 새로운 뇌는 합리적인 사유를 담당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래에 더 새로운 지층이 생기는 순간, 현재의 새로운 지층은 낡은 지층으로 밑에 깔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습관이란 우리의 사유와 정서가 행동의 영역으로 이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별다른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무엇인가를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뇌와 관련한 일련의 연구 결과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새로운 지식과 경험, 깨달음의 획득을 중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거의 습관이라는 매커니즘에 매몰된다는 사실이다. 대화에서 ‘왕년에, 옛날에는’을 입버릇처럼 올리는 계층이 대부분 노년층이라는 현실은 이를 증명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나이든 사람들의 거부 반응은 당연히 완강하며, 그들은 새로운 것을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판단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의 '요즘 젊은 것들은..'이란 말 속에 내포된 의미는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라는 말의 동의어이며, 당연히 지금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과거의 패러다임에 따라 살 수는 없다.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오래된 뇌와 정서를 담당하는 중간뇌의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합리적인 사고와 사유를 담당하는 새로운 뇌에 새로운 지식과 경험과 깨달음을 수혈하여야 한다. 그리고 행동을 통해 우리의 습관은 만들어지고, 습관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수용하는 지식과 경험체계는 응축되어 우리의 정서와 조응하여 결국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어떤 지식과 경험체계를 내재하고 있는지, 어떤 정서를 형성하는지, 그리고 그의 실천 성향이 무엇인지는 각각 개별적으로 독립된 매커니즘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한 인간의 정체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나간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 내가 되고 싶은 인간을 떠올리고 자신의 행동과 정서에 영향을 미치는 사고와 경험체계를 만들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