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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 13:53
필자가 여러 글에서 밝혔듯이 지난 40년간, 길게는 지난 500년간 인류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완전 시장에 대한 환상과, 노동자 간의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자유 무역에 대한 왜곡, 그리고 통화주의라는 금융 위주의 성장이란 사상누각을 건설했던 신자유주의의 삼각 편대에 의해 지구는 그 종말의 위협까지 받고 있다.
수십억 년 동안의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이 정복한 것은 지구 표면일 뿐인데, 마치 지구를 포함하는 우주의 주재자인들 행세하는 일부 탐욕의 엘리트들은 정치와 경제, 사회의 그림자 권력으로 자리해 인류의 주머니를 강탈해가고 있다.
경제 규모는 수백 배나 늘어났는데도 인류 개개인의 삶과 가계의 빈곤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악화되고 있다.
GDP와 삶의 질 간의 차이가 갈수록 벌어짐에 따라 인류는 1%의 거인들과 99%의 난장이로 이분되고 있다.
고전파 경제학의 시조인 아담 스미스와 자유 무역의 주창자인 데이비드 리카도, 이 둘을 화폐주의로 통합시킨 신자유주의의 대부 밀턴 프리드먼 등의 사상이 전 세계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이 판치는 정글로 인도하는데, 미국 워싱턴의 관계부처와 뉴욕과 런던의 금융권이 핵심 집단임을 이제 모든 인류는 알고 있다(종미적 사고로 똘똘 뭉친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이것마저 부정한다).
이들이 전 세계적 자유 무역의 종합관리자이자 심판관인 WTO..
빈국과 개도국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인 일정 수준의 보호주의에서 벗어나 완전경쟁의 자유 무역에 동참하도록 차관과 개발자금으로 유혹하는 세계은행..
경험 부족과 정치권의 부패로 경제 발전에 실패한,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빈국과 개도국을 세계은행 등이 제공한 부채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회생불능의 차원까지 내몬 이자 부담을 덜어준다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정책 목표를 제시해 금융 만능의 세상을 구축해나간 IMF..
이 ‘불경한 삼위일체’를 통해 오직 한 가지 가치(돈 또는 이익)만을 생산하고 그 가치의 독식까지 가능하게 해주는 ‘사탄의 맷돌’은 전 세계를 1929년을 능가하는 대불황을 발생시켰다.
국가 개입을 통해 기술 발전과 인적·물적 자본 축적, 유치산업의 보호와 육성, 제조업의 펀더멘탈의 강화 등의 선택과 집중을 통한 케인즈식 발전 모델은 ‘불경한 삼각편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와해돼 버렸다.
그렇게 전 세계를 파탄시킨 잘못된 경제학과 금융 및 투기 자본들은 그들의 본산인 미국마저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 박살낸 후 지금은 유로존을 맹렬하게 공략하고 있다.
이에 장기 불황에 빠진 미국 재무부와 월스트리트 공동체는 전 세계를 동시에 상대할 수 없어 개별 국가 단위의 공격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것이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비록 이빨과 발톱에 금이 가긴 했어도 미국이란 나라의 야수 본능과 체력은 일대일의 싸움에선 어느 나라라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FTA를 통해 한 국가의 복지 체제와 사회적 지출, 국가 안전망을 파괴하거나 축소시켜 케인즈식 복지국가를 무력화시켜 미국과 월가의 이익 창출에 올인하고 있다.
절대 경제 규모가 작고 기술적 생산성이 떨어지는 나라가 그보다 위의 규모와 생산성을 가지고 있는 국가와 일대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 장기적으로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지적재산권의 강화와 함께 자본의 이익과 안전만을 강조하는 ISD, 무너뜨린 복지체제를 영원히 되살리지 못하게 하는 역진방지조항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상대적 약소국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속국으로 전락한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이미 그 발효까지 마친 한미FTA를 폐지하기는 힘들더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독소조항이 대한민국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기 전에 유럽식 복지국가, 즉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을 확정하는 것이 유일한 보호책이자 현실적인 탈출구다.
아시아경제에서 인용
현재 정치권과 경제학자, 시민단체, 국민들도 이에 대한 필요성에는 거의 모두 동의하는 것 같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 내용과 목적이 조금씩, 또는 아주 다르다.
새누리당 박근혜가 주장하는 ‘생애주기형 맞춤형복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실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사상과 가치가 우파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책 이행 의지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없는 것이 문제다.
얼마나 많은 우익 인사들이 보편적 복지가 재정적자를 심화시켜 나라살림을 거덜나게 만들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논리들을 설파했던가?
이런 논리의 출발점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정치적 이익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논리에서 일어나는 충돌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노르딕모델』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작은 것이 아름답다』, 『센코노믹스』, 『GDP는 틀렸다』, 『평등이 답이다』,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됐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 등의 저작들에서 그들의 모순들이 정치적 이익과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숱한 역사의 기록들로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책들은 케인즈와 폴라니, 슘페터 등에 의해 ‘외부의 개입이 없으면 자기조절 능력이 있는 자유 시장은 완전해진다’는 식의 공정한 자유 시장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민주화론자들의 한계까지 자세히 밝혀준다.
(이에 대한 글로는 http://blog.daum.net/do-justis/197 를 보라)
사실 정치경제적 논리를 넘어 과학적 진리까지 동원하면 자원의 독점과 자산의 사유화를 통한 부의 양극화는 파멸의 논리이자 만악의 근원이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자연이란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지금도 내부적인 조정을 통해 외부적인 압박에 대처하며 안으로부터의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것처럼 완전 시장이란 허구적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헌데 공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자유 시장에 의해 국가와 개인의 부가 증대하고 갈수록 심화되는 경제력 집중도 완화돼, 인간 불행의 핵심적인 근원인 부의 양극화가 줄어든다는 경제민주화론자(특히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의 주장은 그 자체로 비현실적이며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쉽게 얘기하면, 참여자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는 공평하고 완전한 시장이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믿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한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경제학자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것도 이윤 최대화가 유일한 목적인 기업들의 속성상 절대 완전 시장은 이루어지지 않으니 아예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끝내라는 것에 있다.
즉, 재벌과 대기업집단이 중견기업 수준의 수백, 수천 개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그들의 행태가 달라지지는 않으며, 그 때문에 공정한 경쟁을 통한 자유 시장의 형성과, 부의 재분배가 골고루 이루어진다는 것은 허상의 논리일 뿐이다.
사회적 기업조차도 이윤이 많아져야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고 규모를 키울 수 있으며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경제에서 인용
하지만 보편적 복지는 모든 국민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정 수준의 돈을 국가가 제공해주는 것이기에 시장 논리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
또한 모든 국민이 일정 수준 이상(대부분 중위소득 아래 정도에서 결정된다. 불평등을 속이기 위한 단순한 평균값인 1인당 국민소득이 절대 아니다)이 되면 누구나 세금을 내고 소비를 하며 여가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생산성은 높아지면 높아졌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국가가 국민의 생필품을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기본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생필품을 만들고 납품하는 업체들은 안정적인 기업경영을 할 수 있다.
또한 국가가 제공하는 생필품 이상의 것들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높은 가격으로 생필품과 그 이상의 제품을 제공해서 그들의 만족도를 높여주면서도 보편적 복지에 들어가는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이는 평균 이상의 것들은 모두가 사치품이니 당연히 많은 부가가치세가 붙고 그래서 가격이 높은 것이다.
평균 이상의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원하고 소유하고 이용하고 싶으면 좀더 노력해서 더 많은 돈을 벌면 되고 그것에 대해서는 국가도 국민들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특히 인간의 수명이 늘었지만 사회의 위험도는 높아졌기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양질의 건강보험 서비스와, 지식이 돈이 되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고등 교육의 제공은 보편적 복지제도가 갖는 최대의 장점이다.
보통 이 두 가지가 갖춰지면 인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고 무한경쟁이 불러오는 구조조정의 칼날에서도 극렬하게 저항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점이 보편적 복지가 갖는 핵심적인 이점이다.
즉 빠른 기술 발전과 산업의 고도화로 주력 사업의 이동과 변화가 빈번한데, 기업이 이에 대처하려면 상시적인 노동유연화가 필수적이다(이에 대한 글은 http://blog.daum.net/do-justis/212 을 보라).
그런데 실업에 대한 공포와 피해를 막아주는 보편적 복지가 없으면 노동자는 정리해고에 대항해 필사적인 투쟁을 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바로 기업의 매출 감소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진다.
하지만 국가가 실업자에게 재직 시의 월급 대비 70~90%에 이르는 지원을 해주고 무상으로 재취업에 필요한 재교육을 실시해준다면 해고된 노동자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하겠지만, 국가가 질 좋은 생필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무상 건강보험 서비스와 무상 교육을 제공하니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는 확보된 상태이니, 그들이 지갑을 닫아 소비를 줄이는 일들은 발생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기업들은 지속적인 납품이 가능하고, 정리해고로 여력이 생긴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을 찾아 나설 수도 있고, 장기적인 투자를 진행할 수도 있다.
많은 정치·경제·사회학자와 시민단체들이 보편적 복지의 실시가 상향평준화로 이어지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고 있다.
반면에 재벌해체를 주장하는 경제민주화론자들의 주장은 ‘모두 다 조금씩 못 살자’라는 하향평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논리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재벌개혁과 재벌해체 사이의 간격이란 너무나 크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정의부터 정확히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
경제력 집중이 문제인가, 경영과 책임과의 괴리가 문제인가, 과도한 주주 배당이 문제인가, 아니면 조세 정의의 문제인가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 결과를 예측해 올바른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경제력 집중이 승작독식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데 그 핵심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 제시한 책들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그들 간의 치열한 논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프레시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민주화 논쟁을 참조해도 될 것이다.
필자가 이번 글에서 밝혔듯이 12월에 실시될 대선에서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의지가 가장 강력하고, 그 단계적 청사진이 현실적인 후보에게 표를 던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준에서 생산적 의미의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을 확정하는 것에 방점이 찍힌 후보를 검증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검증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은 것이고, 그 검증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함께 망원경으로 전체를 보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자칫 나무를 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고, 숲은 봤지만 나무를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지속가능한 경제란 불가능해진다.
최근에 들어 스티글리츠나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 장하준 같은 세계적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 발표된 노드하우스와 토빈의 기념비적 논문인 <경제적 복지의 지속가능한 지표>와 1987년의 <부룬트란트 보고서> 등에서 시작해 지속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미래 세대의 행복을 현재 우리의 행복과 비교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 현재 세대의 행복부터 측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전 국민 대상의 보편적 복지가 시행되지 않는 한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보편적 복지의 도입 가능성이 멀어지고 희박해졌지만 다음 대통령에 취임하는 자가 이런 역사적 퇴행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으려면 여러분의 가혹한 검증이 필요하고 취임 이후에는 적극적인 지지와 감시, 평가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그것이 국민으로써의 권리이자 의무이며 미래 세대에 대한 현재 세대의 책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각종 현안들 때문에 드문드문 연재하는 필자의 글이 다가올 대선에서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