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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왜 '다시는 여성이 정사를 농락하는 일이 없게 하라'였는가?(수정)

댓글 0 추천 0 리트윗 0 조회 205 2012.06.24 19:25

한반도 정세에 있어  '시기상조 여성대통령'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  구시대적 발상을 이야기 한다.

 

신라에 3명의 여왕이 있었노라고..

 

신라 마지막 여성 군주는 진덕(재위기간:647~654)으로써

즉위하자마자 비담을 목베여 죽이게 하고 30여 명을 죽이면서 정권을 장악한 후

649년에는 중국의 의관을 받아들고, 650년에는 진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아홀을 갖게 하였고,

태화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버리고 영휘라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외세의 개입과 내정간섭을 초래한 것이다.

 


청나라에는 

서태후 [西太后, 1835서태후 [西太后, 1835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1835~1908)라 불린 여성으로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로 알려진 황후가 있다.

 

유기의 고증에 의하면, 1835년 서태후는 산서성 장치현 서파촌(西坡村)의 한 가난한 한족 농민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소겸(王小謙)"이었다. 4세 때 장치현 상진촌의 송사원(宋四元)에게 양녀로 팔려가 이름을 "송령아(宋齡娥)"로 바꾸었으며, 12세 때 다시 노안부(潞安府) 지부(知府) 혜징(惠徵)에게 시녀로 팔려가 이름을 "옥란(玉蘭: 난아 蘭兒라고도 함)"으로 고쳤다. 1852년 예허나라 혜징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궁녀에 선발되어 입궁하였다.

 

서태후는 항상 정치만 관심하고 무슨일이나 보고를 받기를 원했고 아들의 주관되로 결정을 못하게 하다보니 충돌이 많았고 동태후는 조용했다.

 

서태후가 완만하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였다.

대세 판단에 어두운 보수파들은 서태후에게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세를 배척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영·프 연합군의 북경 침공으로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난가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서태후는 일을 망친 보수파들을 처벌하고 더욱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할 결심을 하였다.

 

욕심 많고 진취적이었던 서태후는 궁녀로써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 말, 서태후는 황제는 아니었지만,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며,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함풍제는 그녀의 마음에 담긴 야망을 알아차리고 유일한 혈육의 어머니인 서태후가 훗날 폭주할 것을 두려워한 함풍제는 그녀를 죽일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하고 만다.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어머니 서태후. 그녀의 6살 난 아들이 동치제로 황제가 되자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고 외세의 압박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월이었다.

그녀도 나이 들어 노쇠해졌고 극심한 사치와 향락은 노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간 유폐되어있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가 보낸 보약을 먹고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였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죽음을 접한 후 몇날 며칠 동안 자신의 생일잔치를 열었고, 너무 많은 음식을 먹은 서태후는 이질에 걸린다.

세 살짜리 부의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지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령은 인육과 사람의 피도 보약으로 먹었던 서태후를 낳게 하지는 못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살아생전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유명을 달리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마지막 유언은 다시는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이었다.

 

권력욕구에 자식마저 희생시켜 절대권력을 자랑하던 서태후는 황제보다 높은 권력을 쥐었고,

중국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 사치와 향락을 즐겼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보수 정치 풍토는 결국 청왕조 뿐만 아니라 나라까지 말아 드셨다는 것을 박근혜는 생각이나 해 봤을까?

 

 

서태후가 짖게 한  이화원의 호수는 인력으로 만든 인공호수이며, 

              호수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는  상상조차 할수 없다.

 

명나라에는 9천명의 궁녀가 있었고 한다.

청왕조에도 실질적인 정사는 궁녀들의 혈투속에 이루어졌다.

궁녀들의 권력욕은 아편과 암살뿐만 아니라 출산한 왕족의 아이를 궁녀의 아이와 바꿔치기 하기도 하였다.

궁녀들과 환관들의 권력 쟁취위한 암살과 혈투는 정사를 유린하고 조정과 왕실을 꼭두각시 광대놀음판으로 바꿔 놓았으며 황실 나아가 나라를 유린하였다.

 


당나라  측천무후..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가 있다.

 

636년(당 태종 貞觀 10년)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태종은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14세)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였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649년(정관 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으나, 이듬해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연정에 이끌려 예교를 반하고 그녀(28세)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성격적으로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밑에 있지 못하였던 무측천은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숙비를 폐서인으로 만들고 갖은 악질적인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리면서 이용하여 황후 왕씨마저 폐서인 시켰다.

 

6일 후인 10월 19일 무측천은 황후에 책봉되어 폐서인이 된  황후 왕씨와 소숙비를  곤장 백대씩을 친 다음 두 다리를 잘라서 산채로 술독(항아리) 속에 넣어두고 죽어가게 하였다.

 


양귀비 [楊貴妃, 719 ~ 756]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

당나라 6대 왕 현종. 그의 치세 전반기는 태평성세였지만 양귀비를 만난 후 나라와 백성을 위태롭게 했다.
당 현종(왼쪽)              말에 오르고 있는 양귀비(오른쪽)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양옥환(양귀비)를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었다.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화청지에 있는 목욕하는 양귀비 조각상                 화청지 내의 양귀비 전용 욕실 해당탕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고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의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후, 양귀비를 이용한 고력사는 현종을 식물황제로 만들고  환관들의 당나라가 되어 버렸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19C말~20C초 영국은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합병 ..

영국의 황금기를 연 여성으로 1819~1901년 재위기간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란 호칭을 얻게한 여성 군주는 빅토리아 이다.

 

지구가 돌아 영국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 이상은 낮이기 때문에 이런 별명('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 붙었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선진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인 동시에 제국주의국가였고 대표적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얼핏 들어 대단해 보이는 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영광은 그 영광의 그늘 뒤에 가려진 사회하층민과 약소국의 희생 덕택에 가능한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살상과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보통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째 아들인 켄트공의 딸로서

나이 20세 때 어린 시절 따랐던 레오폴드 벨기에 국왕의 주선으로 독일 색스 코버그 고타가의 왕자 앨버트 공과 결혼했다.

유럽 왕실의 황친을 친척으로 두었기에 '유럽의 할머니'라고 불렸다.

 

하지만 박근혜는 

마누라 폭행하고 성접대 받으러 가서  딸뻘 되는 여자 치마폭에서 총살 당한 박정희의 큰 딸로써 결혼은 물론 자녀도 없다.

또한 박정희는 자국국민을 배반하여 말살하려한 세력에 빌붙어 애국자들을 총살하고 전장지역으로 파병하여 지능적인 학살을 시해하였으며, 그의 별칭은 국제사회에서 '스네이크 박'이라고 한다.

 

2003년 내가 인신매매 당하던 날 박근혜에게 결혼의사를 내비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약물에 당했다는 점

2002년 박근혜가 월북했었던 후 그런 약물들이 활용되었었다는 점에서  박근혜는 빅토리아식 개혁이 아닌

그저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암살행각을 지시하는 사악한 여성으로 '측천무후'에 가깝다.

 

영국 또한 분단된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한국과는 너무나 다르다.

지리적 여건과 시대적 상황을 보았을때도  21세기 국제 정세와 비교할 수 조차 없다.

 

빅토리아 여왕은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앨버트 공을 사랑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 자녀들은 모두 유럽 왕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그 결과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왕실 중 대부분이 빅토리아 여왕과 일정 정도 관련을 맺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치세 동안 그녀를 보좌하거나 함께 국정을 운영해간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남성들이었다.

 

반면, 박근혜는 전여옥, 나경원, 손수조,

김좌진 장군 외손녀가 유전자 검사하자고 제시했는데  거부한  김을동,

비대위 핵심 남성들은 박근혜를 지원하면서도  질타와 비판을 했다는 점에서

박근혜는 수용하기보다는 묵살하고 제거하려 든다는 점에서  성군의 자질보다는 폭군도 아닌 몰상식한 암살집단의 수괴 일 뿐이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해 크게 판세를 그릴 줄 알았던 현명하고 양보심 많은,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는 절대 놓쳐버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로 인하여 대영제국의 전설이 완성된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21세기 첫 대선(2002년)이 있을때이다.

박근혜는 스스로 무능함을 느껴 대선출마 포기 선언 이후  무단 단독 북한행(월북), 인신매매, 정보누설..

그런 박근혜를 배려한 친박 수용.. 그러나, 친박/비박으로 편가르기 복수..

독재당 이회창을 비판하였으나, 사실상 이회창과 다를바 없는 오늘의 새누리당.

 

역사를 회기 시키는 모방 정치를 하고 있는 박근혜..

 

영국 국왕은 흔히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이라고 하면 대체로 모든 권력을 왕 한 사람이 가지며 국정의 모든 것은 왕 뜻대로라고 생각하지만, 영국의 국왕은 내각에 정치의 대부분을 내어주며 왕은 군주의 위엄과 권위만 가진다.

국왕의 위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1970년대 부터 박근혜는 외교사절로 활동할 만큼 퍼스트레이디 였다.

2002년에도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였으나, 무단 단독 월북한 일로 질타가 이어졌다.

노무현 탄핵조장 이후 박근혜는 또다시 퍼스레이디에 올랐다.

이명박근혜..

박근혜가 한나라당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이회창을 모방 하게 된것은  이명박과 그 측근의 뇌물 수수로 인해 종북세력을 한나당에 모두 입성시키게 된 것이다.

이후 한나라당은 망했다.

그리고,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보수를 가장한 정치쑈로 이명박이 식물대통령이 되었다.

현제 실권은 모두 박근혜와 종북,친북,친일,친미 세력 즉 뉴라이트 계열이 장악했다는 점에서 노무현 탄핵이 있은 후와 같은 상황이 되었다.

 

2003년 박근혜는 집권을 하기 위해서라면 '대통령을 죽여버리면 된다.', '전쟁을 일으키고 재집권하겠다.'라고 발언하였다.

결국 박근혜가 불러들인 용병(암살자)들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은 뇌출혈을 일으키고 멘붕이 되어 버렸다.

 

빅토리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며, 역대 세계사 기록의 사악한 악녀의 행각을 답습하고 있는것이다.

 

 

2002~2003년 자문당시

육아노동 관련 자문을 할때도 그녀는

어리거나 늙은자, 노동력을 상실한자는 빼앗거나 죽여도 된다고 하는 사상을 가졌었다.

사람 목숨이 가축같은 소모품 이었을 뿐이었다.

 

이당시 이회창이 이끌던 한나라당에서 퍼스트 레이디 였던 박근혜 였다.

그런데, 자문을 듣고 종적을 감췄던  박근혜는 월북한 후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이회창을 비판하고 나섰다.

 

박근혜는 남들 흉내나 내며 살아가는 인생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21세기에도 그런 생각하는 사람 있나'라고 한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최다 기록을 갖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27차례에 걸쳐 55개국 66개 도시를 방문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목적은 정상회담 개최, 주요 국제행사 참석 등이 주를 이룬다. 또 경제·에너지·자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전략적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도 순방을 통해 이뤄진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시 이동 수단은 최근까지 청와대는 대통령의 해외순방마다 대한항공 또는 아시아나항공 등 민강항공기를 이용해 왔다.


그러나, 이명박은 지난 4월부터 대한항공에 특혜를 주어 장기임차 형식으로 빌려 전용 운항하는 '대통령 전용기'를 통해 해외순방을 다니고 있다.

독점권과 관련하여 위법과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이 항공사 독점이 이명박의 머리에서 나왔다면, 그는 더이상 이나라 대통령이 아니다.

 

70년대 스페인 해외순방이래로 일본,하와이 등 대한민국 특권을 톡톡히 누려온 박근혜에게

서민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국가운영자금?  통치자금 조달을 위한 갈취와 수탈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않은가??

 

2002년 대선전 박근혜와 국정원 무당 영감은

국가운영 방안과 자금이 없다고 전쟁을 계획한 것에 대한 질의 문답을 했었다.

여러 방안들과 자금 조달안을 알려 주었더니

2003년에 찾아 왔을때는 날 인신매매 하였다.

 

박근혜의 아버지 '스네이크 박'이라는 사악한 별칭을 얻은 박정희는 국가운영 방안과 자금 조달을 위해 집단 학살과 유공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암살하였다.

2002년 박근혜와 국정원 무당영감은 전쟁을 일으켜 재 집권 하려 했다.

그들의 주축이된 한나라당은 최근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정권의 실세로 뭉쳤다.

 


 

오로지 따라하기에 모든 인생을 허비한 발끈한 여성과 특정인사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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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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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업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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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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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썸네일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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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세로

총을 쏘면

반동에의해

얼굴에

멍자국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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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끈해서

 

테니스

치는 사진

올리겠지

ㅡㅡ^

딸랑 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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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비키니 입고

수영하시긋네

 

안하기만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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