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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2 09:21
세상에는 어떤 사건도 단순하고 순수하지 않다. 내게 일어난 사건을 원인부터 추적해나가면 나의 잘못, 혹은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게 사건의 원인은 단순히 햇빛 때문에 자신의 여자 친구 오빠를 죽인 뫼르소처럼 부조리한 사회나 세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성찰해보면 나는 완전히 어느 한 쪽인 적이 없었고 다만 어느 쪽이라고 쉽게 간주하거나 다른 쪽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어반복이지만 사실 내 신체와 관능은 한 번도 온전히 진보인 적이 없었다. 내 몸은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보수주의의 특징적 실체를 띠었다. 지금도 내 몸이 새로운 무엇을 수용한다는 것은 즐겨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새로움이 내 몸에 가해지는 자극을 싫어하는 것은 새로움을 수용한다는 것이 기실 고통을 수반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별반 개선되어질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몸과 내 몸의 관능적 기능이 수반되는 일들은 나는 한 번 시도해보고 안 되면 즉각적으로 포기하는데 이골이 나있었다는 말이다.
역으로 본질적으로 나태함을 내재한 피지컬的 성향은 내게 멘탈的 조숙함은 주었다. 내 정신은 고맙게도 상투성, 진부함, 안락, 평온함을 견디지 못했다. 오히려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내 실존을 확인하고자하는 자의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성장하면서 확인하게 되었지만 내 정신은 스트레스를 오히려 사랑하고 있었고, 정신적 안온함이나 평온은 늘 나를 무엇인가 불안하게 만들었기에 육체적 능동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나는 정신적 결렬함을 얻었다고 자복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내 몸과 정신의 서로 대립되는 불안한 동거가 태생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스포츠에 대해 특별하거나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실제 경기에 선발되기도, 경기 자체를 즐기는 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특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직장 생활과 결혼이후 중년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결국은 어느 측면이든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 덕목이기에 나는 현재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인 대가를 혹독히 치루고 있는 것이며, 고통만이 인간을 키우고 숙성시키기에 오히려 고통이 무뎌지지 않게, 고통과 시련 이후에 오는 가치와 깨달음을 놓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늙어가면서 확인한다. 이런 나에게 헝가리 작가 산도르 마라이는 ‘열정’에서 이렇게 나직하게 충고한다. 이 충고는 소위 정치판의 리더가 되기를 작심한 자들도 경청하기를 바란다.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한다네.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원칙이나 말을 내세워 변명하고, 이런 것들이 과연 중요할까? 결국 모든 것의 끝에 가면, 세상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에 전 생애로 대답하는 법이네. 너는 누구냐? 너는 진정 무엇을 원했느냐? 너는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너는 어디에서 신의를 지켰고, 어디에서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냐? 너는 어디에서 용감했고, 어디에서 비겁했느냐? 세상은 이런 질문들을 던지지.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누구나 대답을 한다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명심하게. 중요한 것은 결국 너의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는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