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이 외국 순방을 갔을 때의 일이다. 새벽에 조찬을 하며 그날 일정관련 반기문 외무부장관의 보고를 듣고 협상전략을 세우기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대통령님,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농담 하나 들려 드릴게요.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시죠.”
“미국의 부시대통령, 프랑스와 일본의 총리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골프를 쳤대요. 부시대통령이 샷을 날렸는데 경계선에서 살~짝 벗어나서 공이 떨어졌대요. 그랬더니 프랑스총리는 이렇게 말했대요. ‘알쏭달쏭~’ 일본총리는 ‘아리까리~’ 대통령님은 뭐라고 하신지 아세요?”
“OB (out of bound 경계선 벗어남) 맞습니다 맞고요!”
일본과 프랑스 총리가 부시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OB인데도 잘 모르겠다며 외교적인 수사를 한 데 반해 노대통령은 정직하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직설적인 성격을 빗댄 유머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 다시 회의에 들어온 반장관은 “지난 번 농담에 새로운 분이 추가되었는데 이해찬총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대통령은 “나 답 알 것 같아요, 100미터 밖에서도 이해찬 총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거 확인하러 가볼 필요도 없어요. 보나마나 OB예요 OB!” 노대통령은 한 마디 덧붙쳤다. “하지만 가서 확인해 보면 정말 OB일겁니다. 이해찬은 그런 사람이에요.”
이해찬의원의 성격과 능력을 참 잘 표현한 유머라고 생각된다. 이의원을 따라 다니는 독선 이미지는 사실인 면도 있고 너무 똑똑한 결과이기도 한 것 같다.
특권을 누려본 적 없는 원칙주의자
이의원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 더.
“참, 해찬형님처럼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 첨 봅니다. 야구 경기가 막 시작했을 때인데 야구장 밖을 나서다 우연히 형님을 만난 거에요. 따님하고 둘이 야구장을 떠나시더라구요. 그래서 어디 가시냐고 했더니 표가 없어서 집에 간다는 거에요. 내가 야구협회 사무총장이고 우리가 형님 아우 한지가 몇 십 년입니다. 전화 한 통이면 VIP석으로 모셨을텐데 전직 총리에 현직의원이 어떻게 그렇게 주변머리가 없으세요?”
그 말을 듣던 이의원이 쑥스러워하며 한 마디했다.
“제가 원칙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 잘 못해요....”
소년처럼 수줍게 말하는 이해찬을 보며 저렇게 융통성이 없으니 대인관계는 까칠하겠구나 생각했다. 이 정권이 한명숙, 이해찬 두 사람을 이 잡듯이 잡았다고 하는데 결국 티끌 하나 찾아내지 못한 검찰이 이해찬에게는 두 손 들고 말았다.
문성근대표를 도와 <국민의 명령> 정책위원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다른 일로 당시 이해찬 <시민주권> 대표를 만나 야권단일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그거 그만 두세요.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어찌나 단호하게 말하든지 섭섭해서 더 이상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고생하는 문대표를 생각해 설득을 이어갔다.
“지난 달 정파등록제를 기초로 야권단일정당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세미나를 개최했고 어찌나 많은 사람이 오마이뉴스 생방송을 시청했는지 연결이 다운되기도 했어요. 그 후 성금도 엄청 들어온걸요. 이번에는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거에요. 세미나 발제문 받아서 한 번 읽어보세요.”
합리적이고 유연한 통합의 일등공신
며칠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해찬 대표가 <국민의 명령>을 적극 도와 통합운동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 후 <국민의 명령>은 시민사회단체와 결합해 <혁신과 통합>을 만들어냈고 민주당과 통합하여 한나라당을 앞지르는 지지도를 기록하기도 했다. 통합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해찬이다.
나는 지금도 이해찬 의원을 대하기가 어렵다. 말 잘못했다가 핀잔이라도 들을까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는 합리적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열려 있다. 토론을 통해 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굽힐 줄도 안다. 대장부엉이로 젊고 아름다운 처자들 팬클럽의 아이돌로 등극한 이후엔 더욱 성품이 부드러워졌다. 회의 시간에도 남들이 다 말할 때까지 기다려줄 만큼 인내심도 엄청나게 늘었다.
그가 대중성이 없는 것은 원칙주의자에 까칠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조중동과 일전을 벌인 결과이기도 하다. 요즘은 조중동에 맞짱 뜨는 게 자신의 인기에도 도움이 된다는 걸 아는지 맞짱 뜨는 정치인이 흔해졌다.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만 해도 정치인 중에는 이해찬 유시민 천정배 정청래 정도만 언론에 정면으로 대들었다. 글발과 말발로 원래 대중성이 높은 유시민을 제외하곤 과거 조중동과 맞선 정치인은 언론에 의해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진 면이 크다.
원내대표 선거 때 나는 트윗에서 박지원대표를 지지하는 트윗을 열심히 날렸다. 그가 민주당 원내대표일 때 민주당이 가장 야당다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으로만 보면 부드럽고 착한 김한길-정동영이 이해찬-박지원보다 더 좋다. 하지만 이-박연대를 지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민주당이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고 두 사람이 가장 유능하게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선거만 30여년 연구하고 분석해왔다. 중요한 선거예측을 대체로 맞춘 덕분에 족집게교수란 별명도 있고 미아리에 돗자리를 깔라는 말도 듣는다. 선거전략가로 활동한 각종 선거에서 전승무패의 성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론과 과학적 방법으로 한국정치를 분석하기 때문에 여론의 흔들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한 예측을 해왔다.
2007년 대선은 정동영과 김한길이 당을 깨고 원칙 지키지 않고 무능해서 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마법에 걸린 나라>에서 제안한 전략과 정반대로 갔다. 그 때 내 제안대로 복지주의 들고 나가 이명박의 성장주의와 일전을 벌였다면 비록 패배했더라도 지금쯤은 박근혜보다 막강한 후보가 되어있을 것이다. 투표율 떨어진다고 네거티브하지 말라는 조언도 무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BBK 네거티브로 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론과 경험적 증거는 필자의 블로그에 있는 논문 “정당재편성이론으로 분석한 2007 대선”을 참고하기 바란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서 이-박연대에 대한 역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밀실야합이라는 말도 들린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란다고 독재시대의 논리로 밀실야합 운운하는 건 정말로 웃기는 소리다. 정치는 승자연합을 만드는 과정이고 연대대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표를 구하는 게 왜 문제가 되는가? 민주국가에서 당연히 허용되는 연대를 표결도 허락하지 않고 돈과 공천으로 줄세우기 했던 독재시대의 야합과 구분도 못하니 우리정치가 이 모양이다. 노무현대통령 임기 내 조중동은 독재시대 문화를 가지고 가장 민주적이었던 대통령을 공격했고 그게 유권자에게 먹혔다. 우리가 선진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 같은 실패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박지원 대표는 연대의 기본인 신의와 성실의 원칙을 지키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해찬후보는 박대표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전남에서 최하의 성적을 기록했으니 말이다. 김한길후보에게 쏟아지는 표는 반노표이지 이-박 연대에 반대하는 표라고 보기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당이 <혁신과 통합>의 정신을 부정하고 도로 민주당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과연 민주당이 지금 친노 왕따시키는 연대로 다음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가.
지난 4.11총선 패배가 친노의 책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이가 없다. 나는 원래부터 친노가 아니었고 지금은 노무현재단도 떠난 상태이니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친노라고 몰아붙이지 않기 바란다. 내가 나의 인기나 이익을 위해 정치논평을 하는 사람이 아니란 점만큼은 믿어주면 좋겠다.
도로 민주당이어서 실패한 4.11 총선
한명숙의원은 친노 이미지로 당대표가 되었지만 노무현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저히 민주당의 화합형 당대표로서 공천했다. 공천심사위원회에서 <혁통>을 대변했던 문성근의 목소리는 배제되었고 민주당 486에 휘둘렸다. 친노는 여러 개의 계파 중 하나였을 뿐이며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다. 성품 좋은 한 대표는 정세균파, 손학규파, 박지원파, 정동영파, 486, 혁통, 한노총, 시민사회 등에게 골고루 공천을 나눠주었다. 실제로 자기 최측근들은 챙기지도 못했다. 공생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새누리당이 다수의 부적격자를 공천한 데 비해 민주당의 공천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득권 옹호적이고 원칙 없는 공천에 대한 비판은 피할 길이 없다. 비리 연루 486공천에 가장 화를 낸 사람이 이해찬이었고 이 때문에 탈당까지 생각했었다. 이해찬이 한명숙의 배후이며 공천을 망친 장본인이라는 소문은 누가 악의적으로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완벽한 소설이다. 한 대표는 통합정신에는 투철했는지 몰라도 혁신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나마 한 대표의 화합의 리더십 덕분에 당이 쪼개지지 않았다고 본다. 선거전략이나 실무는 486들이 했다. 누가 당대표가 되어도 당은 486이 장악하고 있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이해찬이 당대표가 된다면 민주당 혁신과 시스템구축에 성공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해찬은 역대 총리 중 가장 일 잘하는 총리였다는 게 많은 이들의 증언이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신념을 믿는다. 그는 성격상 원칙을 버리고 특정후보에게 기울 사람이 못된다.
김한길은 사람도 좋고 부인 최명길의 도움으로 인기도 있다. 자신의 선거운동은 성공적으로 하고 있지만 민주당이 어디로 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부인이 정당 시스템건설을 도와줄 건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도로 민주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원래 사람이 둘 다 갖기는 어렵다. 사람이 좋으면 소통은 잘 할지 몰라도 무 자르듯 개혁은 못하고, 원칙주의자이고 까칠한 사람은 인기는 없지만 일은 확실하게 잘한다.
친노 왕따 시키는 도로 민주당을 원하는가?
조중동과 새누리당에게 서거한지 3년이나 되는 노무현 대통령이 여전히 목에 가시인건 그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누르고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손꼽힌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친노분열, 친노죽이기를 한다. 그들은 친노만 죽이면 대선이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을 안다. 누가 친노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친노는 노무현의 원칙과 신념을 지키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친노를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박지원대표였다. 민주당의 주인은 구민주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를 누르고 대표경선에서 1,2위를 차지한 사람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갖는 게 당연하다. 문재인의원이 무슨 생각으로 이-박연대를 지지했는지는 몰라도 친노와 그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 단합하면 당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원칙 선에서 내린 판단일 것이다. 박지원대표가 문재인후보를 밀어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런 기대가 있었다면 내가 아는 한 문재인은 이-박연대를 지지하지 못할 사람이다. 문재인은 노무현 못지않게 양심결벽증이 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정치인을 바라보는 눈으로 문재인을 판단한다면 그 해석은 실패할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김한길의 선전은 이-박연대에 대한 심판 때문이 아니다. 친노 왕따이자 도로 민주당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조중동이 원하던 일이 제대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과가 정해지지 않아 역동적이라고? 대선승리 가능성이 멀어지는데 역동적인 게 반드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한길, 이해찬 모두 장점과 단점을 지닌 불완전한 사람이다. 두 사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과 당대표로서 최적의 시기가 있을 것이다. 대선을 앞 둔 시기에 좋은 사람 택해 불안정성을 키우기보다는 사람은 까칠해도 일을 똑부러지게 잘하고 민주당 정당역사상 최초로 일 잘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그리고 각종 정책을 꿰고 있는 이해찬에게 맡기는 것이 더 안정된 선택이 아닐까.
비로소 2012년 대선에서 유권자는 유능한 진보의 대안을 갖게 될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