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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1 11:14
살면서 누구나 한 번은 겪는 일 위기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삶의 필수 조건이다.
삶, 죽음 이 구분만으로 위기를 가늠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삶과 연관된 위험이나 어려움 생존 등을 겪는 걸 위기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의 죽음은 여러 의미가 있다. 곤궁도 죽음이고 말 그대로 삶과의 이별도 죽음이다.
일전 친구는 포기를 선택했다. 내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일어 서겠다는 친구의 의지는 존중한다. 가게를 정리하면서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는 슬픈 위안을 들으며 마음이 아프지만 최악의 순간 스스로 찾아 낸 그의 희망을 응원하고 싶다.
이젠 포기가 아닌 것이다. 새 시작이다. 위기는 지났고 희망을 찾아 새 삶을 꾸려야 한다. 그가 잘 해 낼 수 있을까? 주변인인 나는 안스러워 하는 것 말고 그의 삶 속에 껴 들 자리가 없다. 그 친구의 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더라~'
노력과 무관하게 안되는 일들 천지의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이 개혁을 외치는 진보의 입장일 것이다. 노력만큼의 성과 공정성 평등을 이뤄 내려는 대의명분이 진보의 제시다.
그럴까? 정말일까? 그들이 할 수 있을까?
의문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게 만드는 진보의 꼬라지를 보면 그들의 제시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다. 권리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바른 세상을 말한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절망이다. 처절한 권리 쟁투를 보며 바른 세상을 느낄 수 없는데 때에 이르면 그들은 역시나 바른 세상 잘못된 정치를 지적하며 자신들이 대안임을 제시할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 속아야 할 정치 환경 이제 더는 변화가 먹히지 않을 형국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 그 것 같다.
왜 당신들은 다정을 모르는가?
노무현의 말씀들은 모두가 다정하게 잘 살자로 들리는데 그의 후예들은 다정을 잊은 듯 싶다. 그들의 노력은 수박 겉 핥기 쯤으로 여겨진다. 다정은 다가섬이다. 다가서지 않는 존심만으로 정치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 태도를 버리면 좋겠다.
다가 오는 사람에게만 다가 서는 다정은 다정이 아니다. 접대일 뿐이다. 다정 그 방식의 변화 그 것에서 해법을 찾길 바란다.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다정 그 것이 야권이 겨우 살아 낼 비법이다.
말귀에 어두운 이 세상이 참 갑갑하다. 내 친구녀석처럼 모든 걸 다 잃고서야 새로운 희망 한 자락 잡으며 다시 살아 볼 생각을 가지게 될까 두렵다. 지난 선거들처럼 패배의 이유를 잘 모르고 다음엔 이길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이 반복 되는 건 아닐지 그런 우려가 든다.
다정을 모르는 당신들 태도가 지는 결정적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