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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16:04
경향신문이 한화그룹에서 분리된 지 올해로 만 4년이 지났다. 혹독한 산통을 겪은 경향신문이 국내 유일의 사원주주회사로서 재도약을 다짐하고 국내 최초로 편집국 내 직선에 의해 박명훈 편집국장을 선출했다. 사람들은 경향신문의 변화에 놀라면서도 아직은 더 두고 보아야할 움직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지난 2년 간 경영난 해결과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던 경향신문이 올 3월 강기석 직선 2기 편집국장 체체로 들어선 이후 좀더 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 정부의 대북정책 등 각종 현안에 대한 시각이나 관련 기사의 지면 반영 비율에서 경향은 이전보더 더 개혁적이고 확고한 입장을 드러냈다. 언론계는 경향의 진보적 행진을 중앙일보의 열린보수적 변화와 함께 또 하나의 주목할만한 현상으로 평가하고 있다. 경향신문을 여섯달째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는 강기석 편집국장을 만났다.
며칠 동안 계속된 흐린 날씨 끝에 모처럼 햇빛이 내리쬔 20일 오후, 정동 경향신문 사옥에 들어갔다. 편집국장실을 찾았지만 경향신문사에는 편집국장실이 따로 없다. 편집국 한켠에 마련된 책상과 여섯 평 남짓의 손님맞이용 휴게실이 전부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회의실에서 쏟아져 나오고 굵직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잠시 후 강기석 편집국장이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환한 웃음이 그의 노란색 넥타이와 잘 어울린다.
We are on the right track.
강기석 편집국장은 77년 경향신문 공채 17기로 입사해 88년 경향신문 초대 노조 부위원장 시절 럭키금성과 합작 협상 과정에서 경영진 퇴진운동과 5공청산특위 활동을 주도했다. 89년에는 경향신문과 한화의 합작을 반대하다가 강제 해직을 당하기도 했다. 92년 복직한 후 10년 만에 그는 기자들에 의해 선출된 편집국장이 됐다. 80년대 관제언론의 대표격이던 경향신문이 오늘의 독립언론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앞장섰던 강 국장에게 직선 편집국장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독립언론을 표방한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은 '어떤 신문을 만들 것인가, 거기에 어떤 사람이 적합할 것인가'에 대한 일선 기자들의 고민 끝에 선출된다. 선거 과정에서 이미 "나는 진보를 표방한다"고 밝힌 강 국장의 당선은 경향신문 기자들의 소신이 반영된 결과이다. "우리 신문사는 사주가 없기 때문에 편집국장 직선제는 사주로부터 편집권 간섭을 '방어'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에요. 오히려 기자들이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편집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제도입니다." 편집국장은 편집국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상징성까지 가진다. 사람들은 편집국장을 통해 신문의 미래를 가늠하기 때문이다. 편집국장 선출과정에서 후보의 이념적 성향, 철학, 가치관 등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강기석 편집국장은 기자들에게 자주 "We are on the right track."이라고 말해왔다. 6개월만에 그가 경향신문의 사시를 바꿨다거나 사세를 크게 일으켜 세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자신감만은 확실히 얻었다. 강 국장의 자신감은 편집국장 선거 기간에 그가 강조한 '경향신문의 가치있는 생존'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는 데서 비롯한다.
설득하는 진보, 부드러운 개혁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생존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죄악이지." 언론의 역할을 얘기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표정이 사뭇 단호해진다. 강 국장은 신문사가 언론활동을 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단단히 하면서도 항상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가치있는 생존'이란다. 그가 말한 언론의 생존 가치는 '설득하는 진보, 부드러운 개혁'이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강 국장은 건전한 양심을 가진 중간층이 수구에 주눅이 들고,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주장만을 내세운 급진에 휘둘리고 있다며 경향신문은 이들에게 진보와 개혁의 목소리를 합리적으로 전달하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진정한 진보란 이런 것이다' 혹은 '진보가 옳으니까 무조건 따라와라' 식의 '주장하는 진보'가 아닙니다. 또 무조건 수구세력 때문에 이제까지의 개혁 시도가 실패했다고 그들을 몰아세우자는 것도 아니에요." '설득하는 진보, 부드러운 개혁'이라는 문구에는 설득하는 자세로 진보를 지향하고, 최대한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경향신문의 이념적 지향성이 녹아있다. 그는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경향신문이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생존 터전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경향신문이 진보계열로 함께 분류되는 한겨레신문과 차별화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강 국장은 한겨레신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각성한 국민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 대부분의 기자들이 현실인식과 개혁의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며 "기자는 깨어있는 지식인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겨레는 현실을 빨리 바꾸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국민주 회사라는 성격상 주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기자들의 개혁성향을 제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어요. 조중동은 족벌적 소유구조가 기자들의 양심을 억압하고 있고요. 하지만 저희 경향은 사원주주 신문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스스로 반성하면서 한 걸음씩 진보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한경대 VS 조중동으로 나뉘고 있지만 경향과 한겨레도 구분해줬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는 한겨레신문의 경직성을 경향신문이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의 정보와 오락적 욕구를 경향신문은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향신문이 한겨레신문의 독자를 빼앗는 게 아니라며 조중동과 한겨레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경향신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지난 6개월 사이 경향신문에 대해 '신선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진보적 색채를 부각시키면서 경향신문의 자리를 확실히 다지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강 국장이 신설한 종합기획부와 이메일 옴부즈맨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종합기획부는 미디어비평, 신문 칼럼니스트와 이메일 옴부즈맨 관리, 기획시리즈 관리 등 경향신문의 정체성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다. 이메일 옴부즈맨 제도는 114명의 평범한 독자들이 이메일로 경향신문의 기사를 평가하고, 편집국이 이 가운데 좋은 글을 뽑아 매주 2회씩 지면에 싣는 제도이다.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소수의 옴부즈맨을 선정해 일주일에 한두 번 칼럼을 싣는 데서 그치지만 경향신문은 독자의 의견을 지면에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독자와의 교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독자의 의견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 시스템이냐가 신문의 성패를 결정할 것입니다." 사실 그는 '독자가 원하는 뉴스'보다는 '독자가 꼭 알아야할 뉴스'를 더 우선하는 그레이트 저널리즘을 지향한다. 이메일 옴부즈맨은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강 국장의 노력이 반영된 산물이다.
저널리스트의 균형감각
"기자는 자기가 주도해서 사회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사회의 밸런스를 맞춰주어야 한다." 그는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한의학 침술에서 쓰이는 보사(補瀉)의 원리에 빗대어 설명한다. "침을 놓을 때 약한 부분에는 보(補)를 해줘야 하고, 힘이 너무 넘치는 부분에는 사(瀉)를 해줘야합니다. 이것은 인체의 밸런스를 맞춘다는 뜻이에요. 저널리스트란 우리 사회에서 보사의 원리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뉴욕 타임즈 사장이었던 러스 루이스의 한마디도 덧붙인다. "저널리스트의 임무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락한 계층을 괴롭히는 것이다." '스스로 강하되 약한 부분을 도와라(자강부약)'는 그의 좌우명도 밸런스, 균형을 말하고 있다.
강 국장이 저널리스트의 균형감각을 강조하는 이유는 '언론은 절대 스스로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그가 자본족벌 언론을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에 언론이 권력화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틀렸어요. 언론은 사회의 강한 부분(권력, 자본)을 감시, 비판, 충고하면서 사회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춰나가야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경향신문의 역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독립언론 경향신문이 우리 사회의 허구를 깨뜨리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극단적으로 보수화된 우리 사회가 균형 감각을 찾기 위해서는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경향신문이 제 역할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결론은 다시 '밸런스'다.
현재 경향신문은 프랑스 르몽드지와 함께 사원주주 언론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진행중이다. 사원주주 비율이 60%인 르몽드지에 비해 거의 100% 사원주주에 가까운 경향신문은 성공 뒤의 찬사도 실패의 여파도 더 클 것이다. 일부 소수 신문들이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언론시장에서 경향신문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언론의 사회적 역할과 경향의 가치있는 생존에 대한 강기석 편집국장의 뚜렷한 소신은 사주 없는 회사, 독립언론 경향신문의 미래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