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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08:08
“운명은 내 맘대로 바꿀 수 없지만 운명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 위지안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중에서
슬픔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리움 또한 마찬가지여서 살아있는 우리들은 그래서 힘들다. 하물며 “운명이다”라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조차 내지르지 못하게 단단히 못질을 하고 가신임을 추모해야 하는 우리들은 너무 아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바보 노무현을 사랑한 죄로, 바보 노무현을 따라가다가 살아남은 까닭으로 우린 견디어야 한다. 그리고 깨달아야 한다, 비록 운명일망정 운명에 대한 나의 자세는 우리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문재인은 3주기를 보내며 ‘탈상’이란다. 아마도 슬픔과 그리움에서 벗어나 노무현의 꿈과 가치를 향한 새로운 도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노무현을 넘어서자’는 진전된 각오들 역시 그가 넘어지고 쓰러진 길에서 다시 일어나 그가 이르고자 했던 지점으로 나아가자는 우리의 다짐일 것이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에 우린 어쩌면 노무현을 보내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노무현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꼭 그럴 것이다.
노무현이 꿈꾼 나라-정치인 노무현의 가치로부터
‘노무현이 꿈꾼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 노무현 3주기의 화두다. 많은 이들이 이 주제에 대한 소견과 적절한 진단들을 내놓는다. 모두 다 일리 있고 또한 맞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자주와 민주, 복지와 평등, 상식과 원칙, 통합과 통일, 균형과 안배 등등 그의 신념과 철학을 수식하는 낱말들과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많은 정책들의 공과가 제시된다.
그러나 내게는 그와 같은 논지와 논거들이 피상적이다. 노무현의 어법대로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했어야할 책무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안 하고 못하는 지도자를 뽑은 우리의 불찰일 뿐이다. 예를 들면 작금의 대선 정국에서 말해지고 있는 ‘경제민주화’니 ‘보편적 복지’니 하는 화두들이 그리 자랑하며 내세울만한 것인가. 적어도 내가 사는 이 나라가 선진민주시민사회를 지향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국민의 권리이자 지도자가 추구해야할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책무 아닌가.
때문에 나는 다른 시선으로 노무현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노무현은 정치인이다. 우리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정신이 몽매해지고 두근두근 사랑의 열병에 빠졌을망정 정치인 노무현을 빼고 우리의 사랑 또한 말할 수 없다. 정치인 노무현을 이해하고 그의 정치적 신념에 다가서는 길이 곧 노무현이 꿈꾼 나라에 이르는 첩경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앞으로 구현해야할 노무현의 가치이기도 하다.
노무현은 진짜가치를 추구한 정치인이다. 가치에는 진짜가치와 가짜가치가 있다. 경제학적 설명을 첨부하자면 진짜가치란 곧 사용가치요, 가짜가치란 교환가치다. 인간이 원시공동체를 벗어나 현대산업사회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혹은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오면서 화폐는 인간의 경제행위를 영위하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물물교환의 원시경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떤 물건이든 화폐 단위로 그 값이 매겨진다.
화폐 단위로 매겨진 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다. 그러나 어떤 물건이 그 화폐 단위 만큼의 쓸모와 소용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용변이 급해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다른 이가 남기고 간 휴지 몇 장(사용가치)이 제 지갑의 만 원권 지폐(교환가치)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 즉 가짜가치가 진짜가치를 지배하는 것을 부정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어떤 물건의 소용과 쓸모보다는 유명 브랜드와 같이 미리 정해진 가격표에 의해서 가짜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을 우린 살고 있다.
그런데 가짜가치의 지배는 경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에 더욱 큰 문제가 있다. 그런 가짜가치의 지배는 인간의 영역까지를 지배한다. 소위 천민자본주의라 일컬어지는 한국사회의 실상을 보면 우린 급우울해진다. 한국사회에서는 학벌, 출생과 집안의 가계, 출신지역, 맺고 있는 인맥의 후원유무 등이 한 사람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짓는다. 그의 능력과 됨됨이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줘버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강남의 집값은 치솟고 얘들 과외비를 벌기 위해 노래방 도우미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은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죽은 문구가 되었다. 가난은 대물림 되고 가진 자는 온갖 패악과 부정한 수단에도 불구하고 부른 배를 주체하지 못한다.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하고 이중삼중으로 맺어진 끈끈한 저들끼리의 인적사슬은 부와 허세와 허명, 권력을 독차지 한다. 사람은 도구와 수단으로서만 기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바로 가짜들이 판치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한국사회다. 이것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말한 이가 곧 노무현이다. 반칙 없는 사회, 상식이 존중되는 세상이란 바로 인간이 도구가 아닌 사람, 대상이 아닌 주체로 대접받는 사회다. 곧 ‘사람사는 세상’인 것이다. 출신이니 학연이니 등등 인간을 도구화하는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경제의 노예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 외치며 감히 썩은 제도와 관행에 도전한 이가 곧 노무현이다.
물론 그것이 노무현의 실족이기도 했다. 이미 명품으로 값 매겨지고 잘 진열된 수구의 상점 앞에서 노점의 것들도 그 못지않게 쓸 만하다고 바른 말을 한 죄가 노무현이 죽임을 당한 이유다. 학벌도 빽도 없지만 사람 하난 쓸 만하다고 주저 없이 말한 것이 저 가짜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도록 고안된 유기체로 살 일이지 스스로 사고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구실이 다 뭐야? 이를 선동한 노무현은 죽여도 시원치 않을 XX였다.
바보 노무현은 가짜가치가 진짜가치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요지부동 난공불락 중과부적 조족지혈의 비웃음 속에서 일기당천 단기필마 건곤일척의 겁 없는 싸움을 시작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그는 서슬 시퍼런 가짜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가짜야!”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야.” 노무현이 꿈꾼 나라, 바로 가짜가치에 의해 진짜가치가 무시되지 않는 세상, 사람이 주인인 사회가 아니고 무엇일까.
노무현을 다시 만나며 - 프레임으로 가둘 수 없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인 것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 위지안,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중에서
노무현을 넘어서자 했으니 우린 이제 지난 노무현을 보내고 새로운 노무현과 만나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들의 마음 마음속에 파종하고 간 씨앗을 발아시키고 나무로 키워내는 일일 것이다. 그가 뿌린 위대한 생각의 씨앗들, 인간존중의 정신, 치열한 역사의식과 그에 대한 헌신, 우리 주변의 삶에 대한 애착, 보편적 인류애, 정정당당한 게임의 룰과 승복의 문화, 불의에 항거하는 신념, 지역과 이념을 넘어서는 통합의 의지 등등 채 뿌리지도 못한 씨앗들을 뿌리고 거두어야할 사명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해야 한다면 마땅히 참고 감당해야할 것이기에 우리의 슬기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노무현 정치 혹은 노무현이 다른 정치인들과 가장 구별되는 특징 하나는 저 강고한 수구들의 책동에도, 다시 말해 저들이 그토록 은밀하고 음험하게 위장한 그물에 결코 걸려들지 않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즉 수구니 보수니 일제강점기의 친일로부터 독버섯처럼 이 땅을 넝쿨째 뒤덮고 지배해온 집단의 가장 간교한 술수는 언제나 그들의 프레임에 적을 가두는 것이다.
아무리 더러운 부정과 협잡의 실상이 드러나도 저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영악한 저들의 프레임 정치로부터 비롯된다. 차떼기의 부정과 불법이 탄로 나면 천막당사쇼를 하고 조중동 등 저들의 우월한 화력은 쇼를 흥행시킨다. 그 뻔한 수작에도 뭔 망조가 든 것인지 소위 진보정치를 하겠다는 아군들은 스스로 그 폭격의 현장으로 들어가 우왕좌왕하다가 참 허망하고 졸렬한 최후를 맞는다.
경제민주화, 복지 로드맵 등등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꺼내니 얼씨구! 민주당 왈 자신들이 원조란다. 참 불쌍한 정당의 꼬락서니다. 오늘 페이스북에서 전시작전권 환수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을 다시 들었다. 노무현은 북을 감당할 수 있는 전쟁수행능력에 대해 방점을 찍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주독립국가로서 당연히 우리의 군대 우리의 작전권에 대해 너무도 당연한 논리를 이야기 한다. 저들이 준비가 되었네 안 되었네 짓고 까불어도 노무현은 내 나라 군대의 작전권은 내 나라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이 노무현의 나라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너무도 일반적이며 당연한 것들로 채워지고 굴러가는 나라, 그저 정상적인 나라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쩌고저쩌고~” 이는 고대 소설에나 나오는 비정상적인 나라꼴에 불과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게 정상인 거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노무현은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귀띔해주지 않았던가. 총선 깨지고 나니 친노가 어떻고 비노가 어떻고, 새누리 박근혜가 짜주지도 않은 액자에 또 들어가서는 죽은 이미지로 정치를 한다. 제발이지 우리의 길을 가자.
탱자나무가 강남에 가면 귤나무가 된다는 것은 사기다. 이미 말했듯 그것은 가짜의 속임수다. 탱자나무는 어떤 토양에 심어져도 탱자만 열릴 뿐이다. 저들이 쳐놓은 그물에 스스로 들어가 파닥이다 종내 죽어가는 피라미 같은 정치는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노무현의 정치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기에 지금도 살아 파닥이는 거다. 숫타니파타의 경구가 어디 소설 공간의 페미니즘에만 적용되는 경구일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혼자 가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이 광야에서 혼자 울 때 하나 둘 따르기 시작한 많은 무리들이 그와 함께 목 놓아 울며 사막을 건넜듯이, 어느새 우리 삶의 대통령이 된 그가 또한 함께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