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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2 08:20
[again 2002! revival 2007?]10년 전 오늘, 노무현과 시민사회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나.
2002년 대선을 관통하는 네 개의 키워드 이 기획은 2002년 대선 노무현의 드라마를 시간 순서대로 훑어보려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현재의 상황과의 비교가 흐릿해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2002년을 2012년과 비교 평가할 수 있는 네 개의 키워드를 제시하려고 한다. 연대, 언론, 세대, 지역이 그것이다. 연대는 정치세력 간의 연대이기도 하지만 정치권과 시민사회세력의 연대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다른 나라와 달리 시민사회의 합의를 통해 정치권력이 구성되지 못했고, 오히려 임의로 구성된 정치권력이 시민사회와 대립하는 구도를 많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십 수년 전부터 끊임없이 이런 구도를 바꾸려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있었고 최근 백낙청 교수 등은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협치와는 ‘거버넌스’를 주장하고 있다. 2002년의 민주당과 개혁당의 연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사건은 이런 시각에서 2012년의 민주당과 ‘안철수 열풍’의 만남과 엮어서 분석될 수 있다. 언론문제는 2002년에도 있었고 2012년에도 생겨날 것이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갈등’이란 구도도 ‘선수’만 다소 교체된 채 반복될 것이다. SNS의 영향력이 총선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지만 대선은 또 다른 리그다. 세대문제의 경우 우리는 2002년 대선이 처음으로 지역구도가 아닌 세대구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선거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0대에서 40대까지를 한데 묶으려는 야권의 기획 역시 이 당시의 ‘세대선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분석하며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역구도는 세대라는 다른 변수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당분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문재인, 김두관, 안철수 등 주요 야권주자들을 관통하는 것은 ‘PK 대망론’이다. 2002년 대선은 이 PK대망론이 실제로 성사된 선거라는 점에서 지역구도에 대한 정치공학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다. ‘준비된 노무현’, 그리고 노사모가 만들어낸 세대연합 2002년을 돌이켜보면서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당시의 노무현이 지금의 야권주자들 중엔 비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준비된 정치인’이었단 사실이다. 1988년 김영삼의 제의로 총선출마 후 당선되며 정치권에 입문한 그는 당시로서도 13년 정도의 경력을 지닌 정치인이었다. 같은 해 5공 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가 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고 1990년 3당합당에 반대하며 김대중의 민주당에 합류한 후 두 번의 총선과 한 번의 지방선거에서 부산에 도전하여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이란 상징자본을 획득했다. 실무행정 경험이 없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사람을 잘 키우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무현의 대권 야심을 고려하여 짧은 기간(2000년 8월~2001년 3월)이지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행보는 인상적이긴 했지만, 부족한 실무경험은 대통령 당선된 이후 참여정부 운영을 힘들게 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언론과의 관계에서도 노무현은 1991년 조선일보의 왜곡보도에 명예훼손 소송을 내서 승소하는 등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안티조선 운동을 일으킨 언론학자 강준만이 그를 주목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며, <김대중 죽이기>(1995)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던 그는 2001년 4월에 이미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출판하여 차기 대통령 후보로 노무현을 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노사모가 있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안타까운 두 개의 낙선 사례가 있었다. 부산 북강서을에서 노골적으로 지역주의 선동을 한 허태열 후보에게 패한 노무현이 있었고, 오늘날 통합진보당 사태 관련되어서 호명되는 울산연합이 억지로 자파 후보를 내세우는 바람에 울산 북구에서 아깝게 패한 민주노동당 후보가 있었다(덕분에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4년 미뤄진다). 사람들은 아직 후자의 사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전자에 대해서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노무현이 선거에서 마지막으로 패배했던 그 총선 이후 자생적인 팬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 팬클럽들이 모여 통합 논의를 벌인 끝에 하나의 거대 팬클럽인 ‘노사모’가 탄생했다. 이는 일반적인 연예인 팬클럽이 형성되는 과정과 흡사했다.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과 노사모 활동 모두에 관여했고 훗날 참여정부시절 대통령 홍보수석실 국정홍보 비서관이 된 시인 노혜경은 노사모가 ‘H.O.T 팬클럽’을 본땄다고 언급한 적도 있다. ‘노사모’ 홈페이지는 노무현의 공식 홈페이지 ‘노하우’와 함께 ‘노사모’들이 모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방금 쓴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어느 순간 ‘노사모’는 고유 명사에서 보통 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노사모가 보여준 것이 ‘뉴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세대연합’이었다. 다음카페, 아이러브스쿨, 다모임 등이 시대를 풍미하던 인터넷 문화의 여명기에 1960년대 생인 386세대들과 1970년대 생인 당시의 20대들이 게시판에 결합했다. 1982년생 정치평론가 김민하는 아예 “2002년 노무현의 승리는 제로보드의 승리였다”고 단언한다. 그는 “외국의 게시판 문화를 보면,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이 글을 쓰고 그게 최근 올린 순으로 정렬되는 포럼 형식이다. 이런 형태의 게시판은 한 주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나중에 보는 사람이 맥락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근데 한국의 제로보드는 ‘본글’ / ‘RE 형태의 답글’ / ‘본글에 달려 있는 덧글’ 형태로 구성되어 있어 나중에 보는 사람도 검색을 통해 쉽게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더구나 필자 이름으로 검색하는 게 용이했기에 ‘게시판 논객’들이 탄생하기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제로보드를 기반으로 한 한국 인터넷 게시판 문화에서 노사모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글을 각종 커뮤니티에 퍼나르고, 또 퍼날랐고, 그것이 그해의 대선 승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모인 두 세대는 서로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노사모 초기 활동을 했던 당시 20대들은 “우리가 게시판에서 논쟁을 벌이면 386들은 게시판에서 대꾸하는 게 아니라 전화를 걸어서 따졌다”고 회고한다. 두 세대의 연합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이 기획이 끝나기 전에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 어떻게 노무현을 이끌어냈나
안티조선 운동은 그후 2002년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대중운동으로 성장해 갔다. 1998년 가을 조선일보가 정치학자 최장집을 마녀사냥한 ‘최장집 사건’, 이 사건 관련해서 조선일보를 집중비판 한 강준만과 말지 기자 정지환을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가 고소한 사건, 1999년 이한우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령한 법원판결 등이 네티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 ‘안티조선 우리모두’라는 사이트가 탄생했다(2000년). 이 사이트는 제로보드의 사촌뻘인 야소보드를 기반으로 한 사이트였는데, ‘RE 형태의 답글’은 존재했으되 아직 ‘본글에 달려 있는 덧글’은 없었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와 조갑제 홈페이지에서 ‘키배’(키보드 배틀)의 정석을 보여준 진중권은 2001년, ‘군자산의 약속’ 이후 민주노동당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어오는 NL대오를 동물적으로 감지하고 ‘주사파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 논쟁은 인터넷 논쟁의 (흑)역사에서 제로보드가 새로 도입한 ‘덧글’ 시스템을 활용한 논쟁이 무엇인지를 압도적인 스펙타클로 보여준 거의 최초의 논쟁이었다(진중권의 글 한편 한편 마다 덧글이 백개 이상씩 달렸다). 그리고 2001년, 안티조선 운동을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시킨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이 시작되었다. 보수언론과의 타협으로 일관하던 김대중 정부가 조중동의 ‘정권 때리기’에 대해 가장 합법적인 수단으로 반격에 들어간 것이다. 2001년 1월, 김대중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2월 8일 국세청은 7년 만에 언론사 세무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는 6월 19일에 마무리 될 운명이었고 23개 언론사의 탈루 소득은 1조 3천594억원, 추징금은 5천56억원, 그 중 조중동의 것만 2천541억원에 달하게 될 터였다. 세무조사가 시작되자 물론 조중동은 언론탄압이라고 강하게 저항했다. 1997년 대선에서 노골적으로 이회창을 편든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는 달리 중립을 지켰던 동아일보가 민주당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시점도 이쯤이었다. 그리고 이 때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던 노무현은 출입기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면서 “언론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 발언은 며칠 후 언론에 유출되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가 사설에서 그를 거세게 비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노무현은 몇 개월 동안 민주당 내 회의나 행사 연설에서 ‘수구 언론’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그때마다 조중동의 요란스러운 반발과 진보언론의 지지가 잇따랐다. 이런 과정을 통해 노무현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노무현은 어떤 ‘판돈’으로 ‘도박’을 시작했나 드디어 ‘판’이 열렸다. 2001년 말 ‘옷로비 파문’ 등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져들었고, 민주당 총재직을 버리고 당 운영에서 발을 뺐다. 민주당은 경선을 통해 후보를 정해야 했다. “이회창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이인제 밖에 없다”는 '이인제 대안론'이 팽배했던 가운데 이인제는 최초의 국민 경선인단의 비율을 50%로 하는데 합의했다. 노무현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기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노무현을 포함한 다른 모든 후보들이 여론조사에서 이인제에게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노무현은 이런 조건에서부터 도박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당시 노무현이 들고 있던 ‘판돈’은 어느 정도의 크기이며 어떤 종류의 것이었을까? 당시 노무현의 지지율은 5% 정도로, 대선후보로서 의미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5%는 무시해도 좋을 그런 5%는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를 알려면 2002년 당시 유시민이 서술한 2002년 초 노무현의 지지층에 대한 분석을 참조해 보아야 한다.
이 분석은 다소 엘리트주의적인 함의는 있지만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유시민이 발견한 이 계층, ‘노무현’을 계기로 삼아 정치성을 분출하기 시작한 특정한 성향을 가진 집단은 이로부터 십 년 간 한국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그는 사실상 2000년 이후의 정치적 사건들인 안티조선 운동, 여중생 사망으로 촉발된 촛불 시위, 노무현 바람, 탄핵 반대 촛불 시위, 이명박 당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를 주도하거나 관망했던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한 셈이다. 또, 오늘날엔 30대로 접어든 이때의 20대의 후배인 1980년대 및 1990년대 세대들도 이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지금의 안철수 현상과 나꼼수 열풍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조금 세련되고 평균보다 더 진보적으로 보일 때는 ‘강남좌파’라 호명되기도 하고 (2002년과 2012년 사이에 ‘좌파’란 말에 많은 의미변화가 있었다) 좀 더 넓은 문맥에서는 ‘깨어있는 시민’이라 불리기도 한다.
유시민의 설명에서도 단초가 들어있듯 이들의 정치의식은 어디에서나 ‘중간’을 지향한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유시민이 혹은 유시민 이전에 당대의 ‘노무현지지’ 논객들이 ‘발견’해 낸 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은 재벌을 옹호하는 수구 세력도 싫어했지만 기존의 노동 운동 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즉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마법의 어휘가 바로 ‘상식’이었다. 정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학력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한나라당 지지층에게는 우월 의식을 지니면서도, 지식인들의 기득권(?)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무식하다고 공박하는 반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지만, 지식인들이 글을 알아먹게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비난하는 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즉, 유시민이 구별해 낸 ‘노무현 지지층’은 스스로 ‘지식인’도 아니고 ‘민중’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라 생각했고, 지식인과 민중 양쪽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상식’이 ‘보통 사람’의 그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엘리트와 민중을 동시에 경멸한 셈이다. 이러한 그들의 특성은 오늘날의 안철수 지지자와 나꼼수팬, 그리고 강남좌파를 자임하는 이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숫자다. 기자는 그들이 많은 숫자이긴 했지만 기존의 민주당 지지층만큼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서 민주당 지지층을 25%라고 해보자. 그리고 노무현 지지를 선도한 이 집단을 10%라고 해보자. 둘이 합쳐야 겨우 35%다. 2002년의 투표율이 70%였고 그중에서 노후보의 득표율이 48.9%였으니 위의 가정이 산술적으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10%의 노무현 지지층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리고 후보가 노무현이 아니었다면 이 선거에서의 승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편 25% 민주당 지지층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자신들이 노무현 후보의 ‘대주주’였다. 우리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두 집단이 노무현에 대해 가진 생각의 차이가 훗날 참여정부의 통치를 불안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민주당 분당, 열린우리당 창당,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의 뒷 배경에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숨어 있었다. 오늘날 안철수와 나꼼수 열풍을 통해 새로이 정치적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과 기존 민주당 지지자 사이의 갈등에도 전례가 있는 것이다. 2002년 3월에서 4월, 민주당은 당 쇄신안이 정한 방식과 일정에 따라 국민경선에 돌입했다. 경선 일정은 제주(3/9), 울산(3/10), 광주(3/16). 대전(3/17), 충남(3/23), 강원(3/24), 경남(3/30), 전북(3/31), 대구(4/5), 인천(4/6), 경북(4/7), 충북(4/13), 전남(4/14), 부산(4/20), 경기(4/21), 서울(4/27)순이었고, 출마한 후보는 김근태, 김중권, 노무현,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7명이었다. 경선 직전 노사모 회원은 8천여명이었다. 노사모는 경선에서 자신들의 저력을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당시 이인제의 사조직인 민주산악회 회원은 4만여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노사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노무현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는데 이 시각 노무현 캠프에서 이광재는 “이 순서를 봐요! 우리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니까?!?!”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