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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0 08:05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여왕이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5월이군요!”였다. 햇볕이 너무 밝아서, 바람이 너무 향기로워서, 나뭇잎이 너무 푸르러서, 꽃이 너무 흐드러져서, 그래서 세상살이가 더욱 암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5월. 새삼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능으로 사는 벌레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의 ‘변신’을 꿈꾸어 본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하기 꼭 열흘 전, 서강대 이냐시오관에서는 57세의 짧은 삶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의 품에 든 한 아름다운 사람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영문학자이자 뛰어난 에세이스트였던 고 장영희 교수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변신”에 있다고 말했지요. 오늘 새삼 그녀의 아름다운 고백이 제 가슴을 찢는 것은 바로 또 그 5월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5월은 잔인했습니다. “세상살이가 더욱 암울하고 버겁게 느껴”져서 그랬고 일그러지고 어긋난 것들이 바른 것처럼 보이는 요지경 세상에서 “아니야! 그것은 잘못된 것이야”하는 참말을 홀로 외쳤던 한 바보의 주검 때문에 더욱 잔인했습니다. 아름답기에 잔인하다던 시인의 역설처럼 바르기에 죽어간 한 바보의 피는 푸르기에 더욱 붉었습니다.
그 바보가 죽은 이유를 장영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안경을 쓸 때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지만, 목발을 짚으면 1급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모종의 장애인입니다. 아니 신체장애는 겉으로 보이기 때문에 눈에 띌 따름이며, 권력을 지나치게 탐하거나 노동 없이 남의 돈을 먹는 것도 분명 장애입니다. 아니, 신체적 장애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장애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즉 불구였던 것이지요.
노무현이 꿈꾼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의 삶은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엄격한 실천이었습니다. 흔히들 노무현은 원칙과 상식이 반칙과 특권을 이기는 세상, 성실히 일한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말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경제, 민생, 복지, 평화 등의 진보적 가치들이 실현되는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그 노무현이 꿈꾼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 너무나 기가 차서 슬퍼집니다. 한 편의 웃기는 비극을 본 것처럼 어리둥절해집니다. 얼마나 잘못된 세상이면 원래로부터 있어야할 가치들이 몽매에서라도 가져봤으면 꿈꿔야하는 지경에 이른 것인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거의 모두는 그 꿈조차 꾸지 않았기에 불편하고 거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봉건군주의 세상으로부터 근대시민사회로의 이행 이후로 민주니 민생이니 인권 복지 같은 가치들은 이미 그 사회의 줄기세포이자 신경망 같은 것입니다. 상식이란 그 사회구성원들 모두에게 똑같은 관절인 것이고 원칙이란 동맥을 돌아 정맥으로 가는 혈액순환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반칙이란 피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요 특권이란 관절을 부러트리는 무자비한 폭력입니다. 곧 사람을 죽이는 짓이지요.
그 때에 한 의인(醫人)이 있어 죽어 가는 시대의 병증과 폭력의 광기를 경고합니다. 분단으로 인한 반신불구의 강토에서 동서로 쪼개진 지역은 풍 맞은 늙은이 꼴이라 눈물지며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념의 광증에 미치고 썩은 과실의 단맛에 길들어버린 세상 사람들에게 바보의 절절한 호소는 한낱 설 미친 자의 헛소리요 도무지 난데없는 수작일 뿐입니다.
온갖 파시즘과 매카시즘의 망령들은 벌건 대낮에도 이데올로기의 도깨비춤을 멈추지 않았지요. 그 캄캄한 죽음의 묘지에서 그래도 노무현은 이대로 우리의 역사를, 시대를 죽일 수는 없다고 발악하듯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참여정부 5년 속에서의 노무현의 정치이자 외롭고 슬픈 한 바보의 그야말로 ‘바보짓’이었습니다. 노란 미풍에 모여들던 사람들은 찌는 더위를 잊자 이내 그를 버렸습니다. 여전히 시대는 더 심한 고혈압에 동맥경화로 앓고 있었지요.
그런 5월에 한 바보는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세상의 병증을 경고하며 떠납니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골고다언덕의 죽음이 있었기에 부활의 역사가 가능했던 것처럼 그 바보는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희원과 꿈을 온몸으로 증거하지요. 더구나 그 바보는 “운명이다” 그 억울하기 짝이 없는 화해와 용서의 낱말로 나 같은 이에게 수치를 일깨우며 대못질을 합니다.
부끄럽게도 님을 보내고 나서야 그 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에 꼭 살아보겠다는 마음의 결기를 세웁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이 꿈꾼 ‘사람사는 세상’은 병들고 죽어가는 세상이 아닌, 바로 살아 있는 세상이란 것을요. 조물주가 빚어 준대로 관절이 움직이고 피가 도는 산세상이 곧 노무현이 꿈꾼 세상입니다. 5월처럼 생명의 기운이 움트는 세상, 거역과 반역이 섭리를 그르치지 못하는 세상이 곧 노무현이 꿈꾼 세상이었을 것이지요.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노무현의 방식
그렇다면 그립고 보고 싶은 바보가 꿈꾼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감히 이처럼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철학적 테제이기도 한 낱말의 의미를 어찌 저 같은 소견 짧은 이가 말할 수 있을까요. 다만 용기를 내는 것은 상식과 원칙처럼 내 그리운 바보 역시 늘 쉬운 말로 삶의 비밀들을 말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차피 정치사회적 함의가 숙명적으로 들어 있는 ‘사람사는 세상’ 혹은 ‘꿈꾼 나라’에서 노무현이 말한 사람은 쉽게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자, 기득권에 늘 치이고 빼앗기며 신음하는 정치경제사회적 약자, 또는 상식을 존중하고 원칙을 지키는 민주시민,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사회에서의 만민, 교육 인권 등 기회 균등의 천부적 권리에서조차 차별받고 소외된 서민 등등이라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민주니 자유니, 복지, 평등, 민생, 서민경제 등과 같은, 이따위 손톱만큼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잡설로 노무현의 세상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1조의 성문법적 정의에 핏대 올리며 정력을 소진할 생각은 더 더욱 없지요. 톨레랑스(관용)니 노블리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임의식) 같은 홍세화님의 선호품목을 훔칠 생각 또한 전혀 없습니다.
다만 ‘들에 핀 꽃’님이 친절히 일러주셨듯이 ‘배달음식 덮개(조중동)’와 같은 폐지들을 비롯한 수구기득권 집단이 노무현 혹은 소위 진보라 일컬어지는 무리들에게 덧씌우는 어두운 혐의의 진실, 곧 진보니 좌익이니 심지어는 종북추종세력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색깔 놀음의 실체를 까발려 보려 합니다. 이 나라의 치안총수까지 하신 양반, 아니 MB머슴께서 까겠다니까 제가 까발린다 해서 흠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호! 계급장 뗀 자여! 푸른 새 제복에 이름표 대신 번호표를 달고 긴 안식 있을진저.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적인 가름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은 제 입장에서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 같은 용어들은 밀가루 것 물리게 먹은 배속 사정처럼 늘 거북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중도니 실용이나 하는 단어들은 더욱 토악질을 부추기지요. 이런 용어들은 언제나 이념의 잣대 위에 눈금 그어지고 그 양편으로 사람을 가르기 때문인데 제가 노무현의 ‘사람’에 매료된 까닭 또한 같은 이유입니다.
우린 흔히 진보는 왼쪽 보수는 오른쪽, 다시 말해 진보는 좌익 보수는 우익, 예를 들면 진보는 평등 보수는 자유로의 가치지향을 보인다 말합니다. 잣대로 말하면 왼쪽에는 부의 재분배 같은 평등의 가치가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경쟁위주의 자유 개념이 있는 식이겠지요. 좌우익에서 익은 날개를 뜻합니다. 양날개여야 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지요.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양 가치의 지향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가장 모범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일 뿐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계급적 투쟁과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가치가 절대 우세한 사회를 용인할 수도 없습니다. 균형을 향해 고단한 가시밭길을 가야하는 것은 인간에게 짐 지워진 존재의 숙명 같은 것이지요.
제가 노무현을 흠모하는 까닭은 많이 가진 힘센 우편에 맞서 힘없는 좌편을 편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위 진보적 가치라 말해지는 것들에 주목한 방식의 차이에 내 사랑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노무현은 좌편의 가치를 추구하며 스스로 힘 약한 왼편의 편에 서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왼편에 서 있는 듯이 보이나 그는 언제나 균형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영악한 정치인들이 툭하면 내뱉는 그런 중도의 지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잣대니 날개니 다 잊으시고 유치원 초등학교의 시소를 떠올려 보십시오. 한쪽에 사람이 많거나 무게가 더 나가면 시소는 시소로서의 기능을 못합니다. 균형이 맞아야 제대로 된 시소의 운동이 가능하지요. 그러려면 수가 많은 쪽의 사람을 적은 쪽으로 옮겨 앉히거나 무게 많은 쪽을 가운데 쪽으로 당겨 힘의 균형을 맞춰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시소의 원리이고 노무현 정치의 핵심입니다.
그는 왼쪽으로 가서 수를 맞추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공정해야할 균형자가 어느 일방을 편드는 방식이기에 이미 갈등과 반목이 노정되어 있지요. 대신에 노무현은 무게 더 나가는 쪽의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타협하며 덜 나가는 쪽으로 옮기려 애 썼습니다. 수도 이전이나 세종시 같은 정책은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의 자연스런 흐름을 유도한 실증적 예일 것입니다. 대붕의 뜻을 알 리 없는 까마귀떼들의 극성이 다만 안타까울 뿐이지요.
따라서 노무현의 사람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에 경사되어 상대편과의 갈등과 대립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균형자임을 자임하며 양극의 화해와 협력을 이끌고자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한쪽 편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우세한 일방에게 열악한 일방을 돌아보자 호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방식의 가치지향이 그에게는 진보이고 사람사는 세상이었기에 한미 FTA, 제주해군기지 건설 같은 제 편에서조차 따돌림 당하고 비난받는 정책들을 소신껏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라 저는 생각하지요.
저는 그래서 바보 노무현이 좋고 그립습니다. 저는 그래서 노무현이 꿈꾼 나라는 그를 음해하고 모함하며 대리살인조차 서슴지 않았던 불한당들마저도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나라가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물론 그런 나라에서 살아보는 것이 제 소원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언젠가 당부 드렸듯이 제 생전에 꿈이라면 제 아이들 또는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라도 그런 나라에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요. 새삼 당신이 그리운 오월, 그 잔인한 달에 숨죽여 울며 ‘진정한 인간으로의 변신’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