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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事/ 내친구 노무현 죽음까지...제1회(허삼수와 한판 대결)

댓글 0 추천 0 리트윗 0 조회 205 2012.03.20 08:50

秘事/ 내친구 노무현 죽음까지...제1회

함께한 40년 눈물로 쓴다 제1회(허삼수와 한판 대결)                                포맷변환_정인석사진그림.jpg

글/정인석                                                                                                        정인석

                                                                                  

                                                                                               前 열린우리당  지역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상업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으며 졸업 후 삼해공업(주)회사에 같이 입사하여 근무하였다. 그 후 대통령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를 거쳐 부산에서 변호사사무실을 개업하였다.

나는 노 대통령의 학창시절은 물론 인권운동을 할 때도 함께 했으며 초선시절 민주당 동구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종로지구당 수석부위원장, (주)오아시스워터, (주)장수천 감사 등으로 활약하며 대통령 곁을 죽 지켜왔다.

당선 이후 여러 언론의 접근도 많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번도 인터뷰에 임한 적이 없었다. 퇴임 후 같이 살자는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며 묵묵히 일상에 열심히 해 왔다

이제 고인이 되신 대통령이 새삼 그립기도 하고, 또 진영신문이 창간을 하면서 대통령의 추억담을 요청해 와 처음으로 기억을 더듬어 대통령과의 과거를 회고해 보기로 한다.

진영신문 대표 박원철님은 노사모 회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셨고 해서 달리 보답할 길도 없고 하여 나의 추억담이라도 선물로 드리려고 한다.

 

-지금까지 언론에 나온 통상적인 얘기들은 생략하고 히든스토리 위주로 꾸며볼까 한다-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관심을 둔 것은 큰형의 영향이 컸다.

그때 당시 큰형께서는 사법시험에 뜻을 품고 고시공부를 짬짬이 하였다. 그리고 없는 돈으로 다달이 고시계(考試界)란 책을 사 보셨다. 어린 대통령에게는 그 고시계란 책이 성경책과 같이 소중했다. 형님이 보고 난 후 겨우 구해서 읽고 또 읽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을 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이갑도 교장선생의 친구분이 운영하는 어망회사(주)삼해공업에 노무현(대통령) 정인석(만호제강이사) 이충정(제일은행상무) 김수복(금복화학이사) 이렇게 네 사람이 입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취직난이 심해서 그 회사도 20명이 응시를 해서 4명이 최종 입사를 하게 되었다. 입사 때의 일화는 그 회사 사장님이 관상을 중히 여겨 마지막 면접시험에서 관상쟁이까지 동원해서 관상을 보곤 했다. 제일 성적이 우수한 노무현은 경리과, 정인석은 총무과, 이충정은 영업과 김수복은 수출과로 배치되었다. 그때는 산업화 초기라 모든 공장이 새벽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곤 했다. 이 회사 역시 아침 7시30분 출근에 저녁 8시30분이 퇴근이었다.

 

대통령은 집이 진영이라 어차피 하숙을 하여야 했는데 하숙비도 없고 해서 우리집(동구, 범일동)에서 같이 다니기로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범일동에서 회사가 있는 부산진구 부암동까지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우리는 버스비도 줄일 겸 걸어가기로 했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대충 눈비비고 밥 한 숟갈 뜨고 걷기 시작했다. 깜깜한 밤중이었고 회사까지는 걸어서 1시간 반이 걸렸다.

걸으면서 항상 합창으로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김상국의 불나비-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날개 - 노래를 끝없이 부르다 보면 어느덧 회사까지 도착하곤 했다.

 

그때 경리과엔 우리와 같이 졸업을 한 부산여상 신입사원들도 있었다. 그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정숙례란 예쁘장한 아가씨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대통령께서 이 아가씨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괜히 가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모르는 것을 너무 친절히(곁에 붙어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회사 내에서는 점점 대통령과 정숙례양의 관계를 예사롭지 않게 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통령께서 권양숙이란 동네 처녀에게 공을 들이고 있을 때라 우리의 생각이 오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양다리?

또한, 경리과에 남선미란 당시 27세의 올드미스가 있었다. 그 아가씨는 대통령을 무척 귀여워하고 사랑하였다. 미스남의 동생이 사법시험을 몇번이나 보다 낙방을 해서 그에 관한 책이 많았다. 그래서 그 책을 대통령이 물려받았다. 그 또한 대통령께서 사법시험을 본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때 당시 대통령은 워카(군인들 구두)에 군복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박희홍 상무가 불러서 이제 사회인도 되고 했는데 복장이 그게 뭐냐고 나무랐다. 그때 대통령께서 점잖게 월급을 많이 주어야 옷도 사입고 할 것 아닙니까? 라고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대통령께서는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들어가서 용맹정진하여 3번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거기도 애처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대통령께서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고 서울에 접수를 큰형님이 대리로 하러 갔다. 접수를 마치고 접수증을 가슴에 넣고 오다가 큰형님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집안의 대들보인 큰형이 돌아가셨으니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날벼락이었다. 그 멍에를 대통령은 평생을 지고 살으셨다.

 

 대통령께서 연수원생활을 끝내고 대전에서 판사생활을 잠시 하다가 접고 부산 부민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설하였다. 대통령께서 조세업무에 밝은지라 초기에는 주로 조세사건을 위주로 수임을 했다. 그때 나도 경리통이라 지방세 (대도시 내 중과세) 업무에 상당히 조언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개업할 당시(79)에는 사회가 온통 군사독재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터라 일반인들은 쪽도 못 쓰고 힘있는 자만 활개를 치는 실로 불평등한 사회였다.

 하루는 대통령께서 날 부르더니 너도 이제 사회를 좀 알아야 하니 너무 양지쪽만 찾지 말고 음지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를 부평동 헌책방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풀빛출판사가 발간한 책을 여러 권 사주었습니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분단을 넘어서” “전환시대의 논리” 등 나는 그 책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의식화되어갔다.

 

부림사건(81), 미문화원사건(82), 그때 부산은 완전 해방구였다.

한차례 데모군중이 휩쓸고 지나가면 온통 도로는 초토화되어 버리고 교통은 완전 마비가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데모대 앞장을 지켰다. 최루탄 까스를 이기지 못한 데모대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대통령 혼자 아스팔트 위에 버려져 있었다.

전경들은 우습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최루탄 꼭지를 따고 가루를 내어 앉아 있는 대통령의 머리 위에 뿌렸다. 랩도 쓰지 않고 그걸 그대로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있는 대통령을 보며 전경들은 저게 “사람이가”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84년 변호사사무실에 공해문제연구소를 개설했다. 사실 변호사사무실은 문만 열었지 아무런 수임사건도 없었다. 그리하여 운동권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연구소가 되어버렸다. 그때 당시 부산의 운동권 학생들을 보호해 줄 아무런 장치도 없었다. 자연히 대통령의 사무실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여 아지트가 되어버린 거지요. 식사비라도 해결해 볼 요량으로 볼펜이나 연필 등도 팔기도 하고 무척 어려운 때였다.85‘ 86’ 87‘ 민주화의 투쟁은 들불 일듯이 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용광로처럼 끓어 오르는 민주화의 함성은 온 천지를 뒤덮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카톨릭센터 앞, 대청동, 남포동, 서면 태화극장 앞,

엄청난 데모군중의 힘 앞에 독재권력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대통령께서는 85년 민주시민협회 상임위원장. 87년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으셔서 시민운동을 지도해 나갔다. 87년 이석규 열사 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께서는 만장을 앞세우고 장의행렬을 리드했다.

힘없이 죽어간 한 노동자를 위해서 힘을 모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일을 기화로 정부에서는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변호사 업무정지를 시키는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일화로 구속영장 청구 당시에 당직 판사가 조수봉 판사(김해 진례 출신)였는데 영장이 2번이나 청구되었으나 모두 기각시켜 버렸다. 그 후 조 판사는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해서 대통령께서는 21일간의 수감생활을 하셨다.

 

당시 나의 처는 서면 태화극장 앞에서 조그마한 가계를 운영했으며 나는 매일같이 데모 대열에 합류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투쟁만이 나의 길이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내게 가르쳐준 군사독재에 대한 의식화 때문일 것이다.

서면 일대에서 데모하던 대통령께서 내 생각이 났던지, 최루탄 냄새에 손님은 다 도망가버리고 집사람과 둘이서 셔터를 반쯤 내려놓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오셨다.

“야 인석아 나 때문에 장사 못 해먹겠지, 어쩌나 참아야지” 하고 위로하고 가신 적도 있다.

 민주화 이후 지도부 몇몇은 공로를 인정받아서 포상금도 타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름없이 쓰러져간 들풀이었다. 최루탄에, 곤봉에, 맞아가며 그래도 누구 하나 기죽지 않았다. 누구 하나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민주화의 열기 하나로 끝까지 보병으로서 남았다.

 

87년 6월 항쟁은 우리 민중의 승리였다. 아무 누구도 말리지 못하는 민중의 힘이요

민중의 선택이었다. 작고 힘없는 민초들이 뭉쳐서 드디어 독재를 무너뜨렸다.

범일동 오버브리지에서부터 부산역까지 늘어선 시민들의 대열을 보며 나는 울었다.

참으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작은 힘이지만 뭉치면 언젠간 이긴다고 굳게 믿었다.

드디어 군사독재정권이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께 총선에 나갈 걸 권유했다. 경쟁이 약한 남구 쪽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대통령께서는 이왕 나갈 것 같으면 제일 세다는 동구 허삼수 쪽으로 택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옛날 고관입구 KBS 앞쪽 선거사무실이 꾸려지고 맨땅에 머리박기가 시작되었다.

 

실지 당시 대통령이 가진 돈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선거법이 느슨해서 돈을 쓰는 데는 아무 제약도 없었다. 실로 허삼수는 돈이 많았다. 통, 반, 까지 조직책을 두고 조직책 식구들을 전부 선거사무원으로 등록했다. 그러니 동구 주민 거의 전부가 민정당 당원이며 선거수당을 받는 유급당원이었다.

우리측 사무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란 하루 김밥 한 줄 빵 2개가 전부였다.

 

동구는 어찌 그리 언덕이 많은지......

아침 일찍 산 위로 올라가서 내려오면서 한집 한집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또한 한 사람이라도 붙잡고 설득을 하고...  정말 우리 자원봉사자들 칭찬해주고 싶다.

나는 대통령 유인물을 내 돈으로 수만 장 찍었다. 당시는 지하철이 막 개통된 때라 일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범내골역, 범일동역, 좌천동역, 부산진역, 초량역, 부산역, 이렇게 각 역마다 하루종일 유인물을 좌석에 놓기도 하고 지하철을 타고 나누어주기도 했다. 무언가 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유인물을 다 뿌리고 다음엔 초등학교를 공략했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을 맞추어 학생들을 모아놓고 예쁜 볼펜 2개씩을 주었다. 주면서

복창을 시켰다. 인권변호사 노무현, 아빠도 노무현, 엄마도 노무현 우리 모두 노무현, 동요에 가사를 붙여서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고생한 김범구, 유순철 동기가 생각이 난다. 고단했던 선거운동기간도 끝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출처:함께한 40년 눈물로 쓴다/글:정인석 http://jinyeong.co/home/s4_2/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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