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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2 22:17
요즘 보도를 보니, 김기덕감독이 최근에 만든 영화 뫼비우스가 상영제한에 걸려서 국내에서는
상영할 수 없다고 한다.
상영제한의 이유는, 영화의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고, 근친상간을 담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뫼비우스', 제목만 봐도 김기덕 영화의 야누스적인 냄새가 짙게 묻어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 현실과 가상, 원인과 결과, 가해자와 피해자 등등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모호하고 혼동스러움을 상징한다.
김기덕은 영화 뫼비우스를 통해서 가학과 피학의 주체와 객체가 꼬여 있고, 뒤틀려 있음을
보여줄려고 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지 못해서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뫼비우스'는 섬, 나쁜 남자와 피에타 등 그의 다른 영화들의
이식이며, 또 다른 변주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기덕감독은 대한민국에서 자본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몇명 안되는 감독이라고 한다.
후기 산업사회에서는 예술작품도 개량화, 상품화되고, 심지어 예술가들도 엔지니어화되고 있지 않는가.
과거 전위예술가들의 딜레마는, 부르주아 체제를 부정하고 비판했지만, 결국 부르주아들이 작품을
구매해주지 않으면, 실업자가 되어 생계위협이라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지 않았던가.
스펙이 숭배되는 사회에서 제도권 밖의 비주류는 낙오자를 의미하고, 비주류는 일종의 죄악이다.
거대자본에 의해서 대량생산되는 헐리우드의 블럭버스터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김기덕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낯설음과 당혹함과 불편함이라니...
일단 그의 영화들을 보면, 가공하지 않고 팔딱팔딱 살아서 숨쉬는 날 것의 영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코 휘어지는 법이 없는 돌직구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판타지미학인데, 그의 영화는 도발이다.
이 도발이 탈주를 통한 존재미학의 구현인지? 아니면 파괴를 통한 해체미학인가?
야만적인 탈근대 사회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불가학력적이고, 우발적인 폭력에 노출될 수 밖에 없고, 그리고
그 폭력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에게 그의 영화문법은 내 주위를 배회하고 어슬렁거리면서
나를 찔러 아프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
아마도 그의 영화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극단의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고상한 폭력과 야만을
까발리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그의 영화를 본 것은 수취인 불명이었고, 그에게서 좌파적 본능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초에 봤던 나쁜 남자이다.
나쁜 남자는 아내와 같이 봤는데, 아내는 김기덕식 폭력미학을 낯설어 해서,그 후 그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 후에 나는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나쁜 남자를 몇번 더 봤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기덕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배우 조재현을 통해서 대사 한마디 없이 표정 연기와 눈빛만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배우에게 투영시켜 영화를 이끌어 나가면서, 스크린과 관객들을 압도한다.
때론 허무주의가 짙게 묻어 있고, 때론 광기의 빛을 발하는 그 미묘한 눈빛이라니!
영화는 한 남자가 어느 화사한 초여름의 햇살마저 눈부실 것 같은 한 여자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한 마리 야수가 핫도그를 입에 물고 대학로를 배회하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여자에게 시선이 머문다.
흰 얼굴에 흰색 자켓을 걸치고 서양미술사 서적을 들고 남친을 기다리고 있는 청순한 미대생과 검게 그을린
얼굴에 검은색 셔츠를 걸치고, 야수의 발톱 흔적이 선명한 남자와는 심리적, 계급적 거리가 별과 별 사이
만큼이나 멀어보인다.
여자에게 첫눈에 꽂힌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키스를 한다.
기습적인 키스를 당한 여자는 남자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침을 벹고, 남자의 야수적인
파괴본능을 자극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무대는 어느 허름한 창녀촌.
남자는 기어이 여자를 사냥하여 새장에 가두고 사육을 시작한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거부당하자 여자를 창녀로 만들어 버린다.
이른바 사랑하는 여자 창녀 만들기이다.
남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가장 나쁜 방법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두 남녀의 애증은 출구도 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남자는 창녀촌에서 창녀들을 관리하는 3류 건달이다.
남자의 세계는 파고 또 파도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지하정원이다.
이 정원에서 숫컷들은 밤마다 배설의 축제를 펼친다.
여자의 세계에서는 거부될 수 밖에 없는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서 자기의 세계로 여자를 편입시킨다.
여자는 이제 그 흰옷을 벗고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그 하얀 얼굴에 빨간색 화장을 하고 창가에 앉아,배설을
위해 모여든는 숫컷들을 위해서 웃음을 팔아야 한다.
미학적 세계를 꿈꿨던 여자는 불가항력적이고, 너무도 우발적인 힘에 의해서 하루하루 추락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한다.
남자는 반사된 거울을 통해서 여자가 그렇게 몰락하는 관경을 응시하고 있다.
여자도 숫컷들의 영역싸움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내상을 입고 무너져 가는 한마리 야수를 보면서 그에게서
연민을 느끼면서 두 남녀는 그렇게 서로를 파괴하면서 익숙해져 간다.
이것이 김기덕이 영화를 통해서 나쁜 남자를 사유하고, 창조하는 방식이다.
김기덕은 가학과 피학의 메커니즘인 새도매저키즘을 통해서, 자아와 타자을 착취함으로써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모더니티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쁜 남자의 폭력문제는 일차적으로 개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고, 이차적으로는 나쁜 사회,
나쁜 권력을 의미하겠다.
그 영화 상영 후에 나쁜 남자의 새디즘적 영상은 많은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공분을 샀고,김기덕은
자기 영화는 가학과 피학, 그리고 자학이라고 했고, 이것은 자아와 자아,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분열적 관계를
표상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같은 성향이라고 한다.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위압적인 파시즘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가학적인 나쁜 남자도 결국은 피학자가 아닌가.
나쁜 가족, 나쁜 사회, 나쁜 자본, 나쁜 권력 하에서 무수히 많은 나쁜 남자들이 재창조되기 때문일 것이다.
라깡은 모더니티 사회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회라고 했고, 타자의 욕망을 매개로한 모더니티 사회에서
새디즘과 매저키즘은 꼬여있고, 뒤틀려 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