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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1 10:02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열등감이다.
그렇다면 나를 싱싱한 주체로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자존감이다.
열등감을 가진 자는 자신을 한없이 학대하며 주저 앉혀버리고 말지만,
자존감을 가진 자는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자신있게 대중과 함께한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 틈으로 나아가 자신 있게 섞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말로 뱉어내면 이루어지는 마술은 아니자나~
열등감은 평생 나를 을러메며 괴롭히는 감옥이다.
그 고통스러움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과도 같아서
나를 더욱 왜소한 찌질이로 억눌러버린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보듬어야 할 나에 대한 나의 배신
그게 바로 열등감이다.
"공부를 못했습니다."
"무엇 하나 내가 이루어 낸 것이 없습니다."
"취직에도 실패했고, 누구도 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키도 작고 유머감각도 없어요. 그렇다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날 보면 불편해합니다. 그게 싫어서 사람들을 피하게 돼요."
"중고등학교 땐 친구들에게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돈도 빼앗겼고 그래서 사람들은 날 모두 찌질이 등-신이라고 생각했죠."
어릴적 체험은 내 안에 뱀처럼 꽈리를 틀고 들어 앉아 내 심성을 핍박한다.
넌 찌질하다고,
넌 상등-신이라고,
넌 개만도 못한 실패자라고,
그러나 내가 나를 향해 쏟아붓는 이 수치감은 참으로 독선적인 확신에 불과하다.
엊그제였다.
경차를 타고다니는 내가
이웃들과의 만남에서
아우디, 벤즈 등 외제차를 끄는 젊은 아빠들 틈에서
왜 어색해하고 불편해했을까~
골프 혹은 외제차 이야기
누가 어떤 차를 가졌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이 주도되면서
내 의식속에서 난 경차나 끄는 부끄러운 아빠가 되어버렸고,
그 아이들과 꺼리낌 없이 섞이는 딸아이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경차는 나만 타고다니는건 아니었다.
공무원인 희주아빠도 나와 같은 차종의 경차를 5년째 타고다닌다.
희주아빠도 나와같은 심정이었을까?
하지만 내가 그를 바라보는 인식은 달랐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흡수되며 소통하고 있었다.
당당하고 떳떳했다.
그렇다면, 희주아빠는 날 어떻게 보았을까?
내가 던진 몇 마디 말에 사람들이 박장대소하고,
그래서 그런 술기운으로 간신히 그 공간을 버티고 있었다고 짐작이나 할까?
열등감은 관점의 문제다.
삶의 가치와 인식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열등의식은 비교적 넉넉하게 극복될 수 있다.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를 내 주인으로 세워 내가 설정한 내 삶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난 내가 타는 경차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혼자 타는 데 큰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큰 차를 살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난 그들 틈에서 왜소한 찌질이가 되었는가?
남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존감은
내가 내 주인이라는 강한 의식에서 온다.
남의 시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 판단이 나를 세우고 살게 만든다.
어릴적 경험했던 부정적 체험은
나를 철창속에 꼭꼭 가둬버린다.
자존감만이 그 철창을 부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로 나를 지탱시킨다.
추가 -
이 공간에 기를 쓰고 드나들며 승리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나름 심리분석을 시도해 본다면,
열패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이곳밖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고, 명분을 세워 정당화시키고, 공격하고 분노한다.
하지만, 그건 열등의식의 위험한 발산에 불과하다.
자존감은 절대로 그렇게 세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