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권자들이 무지몽매하다고? 웃기지 마라! 우린 다만 저들의 천박한 꼬라지를 조금 더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볼 뿐이다.
대중들이란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김수영이 노래한 것처럼 대중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그런 존재이다. 대중은 늘 다시 일어난다. 길어야 10년이다. 한국전쟁은 조금이라도 민주와 민족과 자주를 생각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 버렸다. 오죽했으면 고은은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라고 노래했을까? 영국의 한 신문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야유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만 7년이 채 안 돼서 4·19가 일어났다. 그 4·19를 박정희가 탱크로 짓밟았다. 그리고 10년 만인 1971년에는 의사와 판사들이 파업을 하고, 노동자와 빈민은 폭동을 일으키고, 학생들은 데모를 하는 등 일 년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박정희에게 삼선개헌 이후 첫 임기를 시작한 1971년은 촛불에 데인 이명박 정권이 보낸 2008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견디다 못한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했다. 모든 것을 짓밟고 동토의 왕국을 만들어 버린 유신체제는 꼭 7년 만에 박정희가 총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나 버렸다.
박정희가 죽은 뒤 민주화냐, 독재유지냐의 싸움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처절하게 진압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패배였다. 그 처절한 패배에서 백만 인파가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군 6월항쟁을 만들어내는데 딱 7년이 걸렸다. 그 때 군사독재 정권을 끝장냈어야 마땅하건만 양 김씨가 싸우는 바람에 질래야 질수 없는 싸움을 지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난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운동진영의 일부를 끌어들이는 3당합당을 통해 생명연장을 시도했다. 지금 한나라당의 의석은 170여석이지만, 보수대연합을 표방한 3당합당을 통해 출현한 민자당은 전체 의석의 2/3를 넘어 220석에 육박하는 거대 정당이었다. 이제 민자의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고, 그때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마냥 최소 50년 동안 장기집권 할 것이라고 수구세력은 떠들어댔다. 그러나 3당합당이 있고 꼭 7년 만에 대중들은 정권교체를 단행해버렸다.
대중들은 늘 다시 일어나지만 그들이 일어나는 순간 역시 절묘했다. 대중들은 가장 암울했던 순간에 일어나곤 했다.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기습, 점거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거기서부터 박정희가 총을 맞을 때까지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6월항쟁이 있기 직전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86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끝낸 군사독재정권은 운동권을 싹쓸이 한 뒤에 88올림픽을 자기들만의 잔치로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의 매일 신문에는 00당 사건, 00동맹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시기의 건국대사태에서는 무려 1200명이 구속되어 단일사건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속자를 내었다. 공안통치가 시작되고 숨죽이던 민주화 진영이 좌절의 한숨을 쉬고 있던 즈음. 대공 남영동분실에서 박종철이 죽었고, 딱 5개월 만에 백만 인파가 참여한 6월항쟁이 일어났다.
광주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박종철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6월항쟁은 가능했을까? 우리의 역사는 죽음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현대사의 전개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를 지금 구체적으로 점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들이 그 죽음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역사는 대중이 흘리는 눈물만큼 변했다. 지금까지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고, 우리는 아직도 속으로 울고 있을 뿐이다.
4.11 총선이 이제 3일 앞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절망이라고 좌절하고 있을 때, 국민들은 반전의 역사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슬픔을 간직하고 2013년 이후의 한국 사회의 미래를 청사진하는 총선의 결과가 기다려진다. 과연 우리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마음 속으로 작정하고 있을까?
-이 글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한홍구 교수의 한국사이야기' <특강>의 내용을 발췌, 펀집하였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