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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슬렁슬렁 주말걸봉: 영동역 - 추풍령역

댓글 2 추천 6 리트윗 0 조회 76 2013.05.10 08:45

5월 12일 일요일에 노무현재단 문성근 이사님과 함께 하는 남산둘레길 걷기를 시작으로

5월의 노무현 4주기 행사 '~~ 포기하지 않습니다'가 공식으로 개막된 분위기입니다. 

제 시민단체의 협력으로 피날레를 장식할 서울광장 행사가 무척 기다려지는 지금

노무현의 5월을 국민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 행사의 홍보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동네와 직장에 입소문을 내주시고 재단 홍보 포스터를 돌립시다.

연인, 친구, 가족들이 시청거리로 쏟아져 나와 노무현을 느끼게 합시다.

 

 

 

08:19. 오늘 출발지다. 하룻밤 침대, 1인용 패키지 목욕탕, 9시 영상뉴스 다 해서 3만5천원이다. 조치원역에서도 그렇고 역전 모텔은 전국적으로 가격을 담합했나 보다. 빨래비누가 없는 게 아쉽지만 피곤양을 옆에 끼고 정신없이 잤다. 노란 티셔츠만 빨아 밤새 말린 후 이번에는 내의로 입고 거리로 나섰다. 아침은 빠사님이 주고 가신 다양한 떡 간식으로 간단히 해결하고. 출근하는 중고등학생들과 만나면서 영동 시내를 벗어나니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밑에

 

 

마을 유래비가 서 있다. 비에 따르면 마을은 (언제인지 밝히지 않은 시절부터) 황해도 회령 사람(회령댁)이 와서 사는 바람에 마을명이 회동리가 되었다고 한다. 중병으로 죽은 남편을 따라 목을 맨 21세 이씨 부인을 위한 경주 이씨 효열비도 있고, (어디와 비교했는지 모르지만) 포도를 (여하튼) 처음으로 재배했고, ‘도투리묵’을 전국에서도 제일가는 맛으로 승부를 걸어 자녀들의 학비를 충당했다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전하며, 고향발전과 인화단결을 위해 비를 세운다는 글자가 적혀 있다. 아마 나는 외지인으로 이 비를 끝까지 읽은 최초의 인물이지 않을까.

 

 

조금 더 가니 KTX 철도가 지나는 다리 밑에서 서로가 서로에 게 놀란 모습의 장승이 2.5쌍 홀수로 서 있었다.

 

 

수원 교외부터 중고특장차들이 도시의 단면을 드러내듯 영동부터는 포도밭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크고 작은 와인공장들이 길 따라 포도밭을 끼고 산재해 있다. 와인코리아다. 이 구간 도보여행을 끝내고 올라와서야 알았다. 이곳이 2008년에 대통령께서 퇴임 후 여사님과 함께 방문하셨다는 곳임을.

 

한 개인 블로그의 사진이다.

 

인용문: 노 전대통령은 와인코리아에서 마련한 방명록에 "가능성을 증명해 주신 선구적인 노력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큰 성공을 예감합니다. 아자"라고 쓴 뒤 정군수로부터는 국악기제작촌에서 만든 가야금과 윤 대표는 포도주와 와인 잔을 방문기념 선물로 받은 뒤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고향마을인 봉화군으로 출발했다. 윤병태 와인코리아 대표(48)는 "노 전대통령이 재임 시에도 농산물 가공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와인코리아 방문을 생각하고 있었다"며 "이 같은 사전 제의로 포도축제가 열리고 있는 영동방문이 이루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노무현재단 사료관의 사진이다.

[사료관 가보기]

 

[충북일보 사진]

 

잠시 쉬면서 노무현재단 깃발 단독사진 한 컷.

 

 

마을 초입마다 거목의 느티나무나 소나무가 풍치 좋게 자리를 잡고 있다.

 

 

김천을 36km 남겨두고 국도와 철길이 나란히 나란히

 

 

10:40

 

 

[이하 <시민사회신문> 설동본 기자의 글과 몇 개의 인터넷 글을 짜깁기 했다.]

 

 

 

노근리사건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 뒤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 동안 충북 영동군 하가리와 노근리의 경부선 철도 및 쌍굴 일대에서 참전 미군에 의해 발생한 피난민 대량학살 사건이 있었다.

 

[도로 뒤의 동굴입구. 총탄 자국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미 제1 기병사단과 소속 미군들의 무차별적인 기관총 및 소총사격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채 죽어갔다. 인근 미 제25 보병사단에는 피난민 속에 적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전선을 통과하는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영동군이 공개입찰로 지정한 노근리 국제평화재단에서 3억6천만원의 지원을 받아 2014년까지 공원 관리와 평화교육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이 공원은 6·25 전쟁 초기 황간면 노근리에서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지난 2008년 6월부터 국비 191억원을 투입해 황간면 노근리 일원 13만2240㎡에 위령탑, 평화기념관, 조각공원, 강의실·숙소 등이 있는 교육관, 조각공원, 야외전시장 등이 조성됐다.

 

 

높이 25미터의 탑신은 5개 기둥으로 오방(동서남북중)을 나타내며 1950년과 50여년간 노근리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50년의 세월을 상징한다.

 

[숨을 거둔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여인의 우측 어깨에 총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 보인다.]

 

이 사건은 정은용 씨 한 개인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정 씨는 1977년 10월 노근리 사건을 다룬 중편소설 <버림받은 사람들>과 1994년 4월 노근리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하였고, 결국 1999년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깊은 유감(deeply regret)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노근리사건을 보도한 AP통신은 2000년 탐사보도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2월 9일에 국회에서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및 유족 심사와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2005년에 노근리 역사공원 조성 기본계획이 수립되고 집행되었다가 4년이 지난 2009년에 노근리 역사공원이 평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사단법인 노근리 국제평화재단은 매년 노근리 국제평화학술대회를 개최해 과거역사를 성찰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학자와 문화예술가 등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노근리의 상처를 평화적으로 승화시켜, 인권연구의 지평 넓혀나가고 있다.

 

 

또 10년간 이어온 초중학생 대상 노근리 인권백일장과 노근리평화상 시상식을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 특히 올해부터는 직장과 회사 등을 대상으로 인권과 역사탐방 등 워크샵을 유치하고, 각 대학과 연계해 대학생 인권세미나 등을 노근리 평화공원으로 유치해 노근리 평화공원을 세계적인 인권과 평화의 메카로 인식시켜나간다는 계획이다.

 

 

계획의 성공을 빌고 평화확산의 전당으로 승화, 발전되길 기원한다.

 

 

공원 내에는 박건재, 박찬걸, 임종찬 세 작가의 공동작품만으로 구성된 잔디밭이 있다. 앞줄 전시작품의 전면은 이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야 볼 수 있게 만든 동선이 특이하다.

 

 

한 영동 아저씨의 도전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약 5도의 경사가 진 국도를 기어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고 있다. 대충 2킬로미터이다!

 

 

정오가 조금 못 된 시간에 이상할 정도로 깨끗이 청소된 보도가 별도로 마련된 굴속을 지나 황간삼거리를 내려와 여기에서 올뱅이국을 먹었다. 마지막 국물 한모금까지. 급한 메일을 꼭 받아야겠다는 문자 메시지가 거래처에서 날라 왔다. 기가 막혔다. 나의 구형 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파일을 열어 확인하고 수정 후 저장해서 다시 그 파일을 보낼 과정을 생각하니 오늘부로 그냥 봉하에 들어가는 게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황간우체국이 나타나 우체국장을 찾아 내 신세를 한탄하고 인터넷 좀 사용하자고 청했다. 국장님은 우체국 인터넷망은 국가 행정부에서 관리하기에 민간업체 메일은 사용 불가라며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면사무소 이용을 권했는데, 방향이 삼천포방위라 포기. 나와서 정신을 가다듬고 두리번거리다 찾은 게 황간(黃澗: 물이 채워진 골짜기)역이다.

 

 

대한의사 이건석(李建奭) 선생 기념비다. 미욱하게도 처음 듣는 분이다. (사실 걸봉에 나서는 순간부터지만 ㅜㅜ) 선생은 1852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금릉군 *** *** 503번지[현 경상북도 김천시 *** *** *****]에서 태어났다. 유생의 신분으로 각종 상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소수(疏首)로서 일제에 복수를 하여 종사의 위기를 타개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6년 황제 폐위 음모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안경수·권동진 등이 귀국하자 그들의 처단을 청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1898년 이건석은 건의소청(建議疏廳)을 통해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대해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존성소(尊聖所)를, 7월부터 10월에는 도약소(都約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1902년 이건석은 이른바 토역(討逆) 운동의 공으로 주사에 임명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이건석은 전쟁의 승리자가 누가 되든 간에 피해는 한국이 모두 뒤집어쓸 것이라는 염려에서 자강의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아울러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보호국화 책동에 맞서 13도유약소(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승지 이석종을 상소 책임자로 삼아 이토 히로부미에게 항의문을 전달하고 일진회의 선언서를 반박하는 변명서(辨明書)를 올렸다. 고종의 회유에도 상소 운동을 계속하던 이건석은 1904년 11월 17일 새벽 일본군에 의해 상소의 주모자로 다른 네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건석은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상소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1906년 5월 10일 피를 토하고 옥사하였다. 그의 유해에 남아 있는 유서에는 “오호라. 죽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제대로 죽는 일이 어려운 법이라.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국적(國賊)들을 베지 못하고 국권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를 토하고 죽음에 임하여 몇 글자로 영결하노니 나를 위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고 장례를 호사스럽게 하지 말라. 오직 내 뜻을 계승하는 것을 마음에 두도록 하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묵념.

 

 

기꺼이 컴퓨터를 내준 역장님께 드린 선물이다. 초콜렛 바 두 개는 어제 빠사님이 넘겨준 거고 수첩은 재단에서 받았던 선물이다. 나는 포터. 작은 감사의 표시에 정색을 하면서 완강히 거부해 도망치듯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철도공사도 아직은 행정부 관할이었다. 메일을 보내지 못했다.

 

문자가 또 한 통 들어온다. 재촉하는 메시지인줄 알고 놀라서 보니 나무숲산님이다. 마침 추풍령 근처에 올 일이 있는데 언제 역에 도착할 거냐 묻는다. 넉넉히 15:30이라 대답했는데 조금 찝찝하다. 그 분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으니. 메일은 결국 가족이 운영하는 것 같은 도로변 주유소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가에게 초콜렛을 선물하고 사장님에게는 봉하 CD로 답례하였다. 부인인 듯한 여자가 행선지를 묻곤 장도의 안녕을 빌어준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살갑다.

 

 

시골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폐비닐이 운치 있게 바람을 타며 춤으로 응원한다.

 

 

서도탑지공원이 깜짝 출몰한다. 한국서도협회에서 건립한 공원으로 중국의 글씨가 아닌 우리의 명적을 찾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글씨를 모아(集字) 한국 최고의 서예가들이 쓴 비석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비석은 20여점이 채 안되었다. 국내유일의 집자비림지. 관람객은 나 혼자. 입구에 중년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오줌만 누고 휙 떠나갔다.

 

 

이제부터의 도로 패턴이다. 좌측부터 마을 시멘트도로, 왕복4차선 4번국도, 그 옆이 경부선철도, 제일 우측이 경부고속도로. 간혹 마주오는 트럭이나 택시 운전자들이 비상등이나 경적으로 응원을 보낸다. 마을도로가 너무 휘어가면 국도룰 타고 마을도로가 예쁘면 다시 거기로 넘어가고 하다가

 

 

오후 2시 22분에 임진왜란 때의 영웅 장지현 장군의 전적지를 만났다. 2천명의 의병으로 1만명의 왜놈을 물리치셨다가 이후 백병전에서 장렬히 전사하셨다. 그때가 58세. 세 개의 문을 지나야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묵념.

 

 

농산어촌전원학교 추풍령초등학교이다.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외양만큼 아이들이 반듯하게 커나가길

 

 

비는 마음들일까?

 

역을 눈앞에 두었을 때 반대 방향에서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오는 분이 계시다. 일이 있어서 들렸다지만 일부러 싣고 가려고 오신 게 분명했다. 추리닝 바람이라 웬 일이냐고 물으니, 내가 오고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서 같이 걸어오려고 했단다. 큰일 날 뻔 했다. 국도와 마을도로를 내 마음 가는 대로 갈아타면서 왔기에. 점심을 안 드셨다기에 동네 중국집을 찾아가 다시 점심을 먹었다. 숲산님은 곱배기, 나는 보통.

 

 

추풍령(秋風嶺)은 그 지명의 유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추풍이라는 마을이 있은 후 추풍령과 추풍령면이 생겨났고, 추풍령은 추풍 마을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추풍령 고개는 역전앞과 같은 동어반복의 오류이다. 추풍령면은 고종 광무10년(1906)에 비로소 경상북도 상주에서 충북 영동군에 편입됐다고 한다.

 

누적: 24.1km /238.8km 비공식 누적: 255.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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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ㅅ 시지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