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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6:31
가난한 자들은 소비할 여력이 없고, 부자들은 소비할 의지가 없다. 지금은 지나간 MB경제의 표현이다. 트리클 다운이니 마중물 효과라고 치부했지만, 경제는 침몰했다. 누가? 가난한 사람들이..가난한 사람들은 저축을 꿈꾸지도 못한다. 오히려 소비로 통하여 경제활성화에 기여했다는 것은 생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축은 죄악이다. 저축을 무시하고 소비가 경제에 가장 도움이되고 소득의 무자비한 지출이 경제활성화다. 소득의 분포도로 따진다면 그렇다.
지역의료보험 가입자 중..151만 가구가 6개월 이상 체납하고 있다. 이정도면 사회안전망이 붕괴되었다. 151만 가구의 체납은 현대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다중채무자" 수치와 비슷하다. 여러 금융권에서 빌린 채무다.다중채무자들은 자영업자들로 추측된다. 국민연금 사업장 가입자 중 4만이 넘는 업체가 체납이라고 한다. 노후도 점점 사라진다는 의미다.
진보의 경제와 보수의 경제가 다르지 않다. 일단 먹고살아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복지다. 복지의 시초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베버리지 보고서는 전후 해결책 중 하나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대책으로 작성되었다.
계급내지 이익의 투쟁..산업혁명으로 계급도 변했다. 산업의 발달로 신흥 부르조아가 형성되었다. 마르크스가 징징거리며 구걸하는 편지의 당사자인 엥겔스도 신흥 부르조아였다. 신흥계급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의 월급과 식료품 가격의 불일치였다. 당시 영국에는 곡물법으로 인하여 기존 토지계급의 이권만 보장되는 사회였다. 결국 신흥 부르조아가 이겼다. 곡물법은 폐기되고 자본주의의 사회가 활짝 열렸다.
참고로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혁명이니 이런 용어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멋모르는 좌파가 마르크스를 이용할 때 나타나는 오류다. 진보의 경제도 보수의 경제도 모두 같은 기반에서 출발했다. 단, 해석이 다를 뿐이다. 진보의 경제도 이익이 가능해야 성장한다. 보수의 경제도 이익이 없다면 성장은 없다. 자본주의의 원조인 애덤스미스도 국가의 부에 대한 것보다 "도덕감정론"을 먼저 썼다는 것. 보이지 않는 손보다 보이는 손도 필요했다고 본다. 단지 해석을 달리 할 뿐이다.
진보의 경제는 배분에 적당하고 보수의 경제는 성장에 유리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둘다 정답이 아니다. 서로서로 약점을 보완하는 관계다. 현실로 비교하자. 길을 가다가 거지에게 돈을 적선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꼈다가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니 애초에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땅에 진정 진보주의자라면..아니 진보경제라면 이익이 없어야 가능하다. 짝퉁 진보도 있다. 사회적 기업과 공정무역,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체결한 무역협정도 이와같다.
자, 진보의 경제는 손해내지 원가에서 판다고 가늠하자. 진보의 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 협동조합의 형태도 마찬가지다. 이미 마르크스 시대에 협동조합이 나왔다는 사실을 도외시하지 말자. 협동조합은 노조와 마찬가지로 보수의 경제를 일부분 차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협동조합도 이익이 남아야 한다. 선순환의 고리는 형성된다. 지역적 경제를 위한다는 명목과 다수의 이익을 구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문제는 규모를 키우기 어렵다. 대기업의 효율적 투자와 비교하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협동조합의 문제다. 바로 이런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유기농과 가치를 내세우는 전략이다. 품질과 가격으로 가치를 측정한다면 협동조합이 경쟁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굳이 진보의 경제로 나누지 않아도 된다. 그냥 상도덕이라야 된다.도덕의 기본이다. 뭐 거창한 진보의 경제라고,보수의 경제라고 편가르지 않아도 된다. 지금 한국의 대중들 대다수는 보수의 경제에 기대고 산다. 그럼 보수의 경제라는 궁물을 쪽박차듯이 나와야 하나.
경제라는 함의는 이익이 내포되었다. 보수든 진보든 경제적 목표는 하나다. 이익이다. 나쁜말로 하면 궁물이다. 백원을 기부한 사람에게 가치가 있다면, 십원짜리는 보수가 된다.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법률과 제도와 주의는 절대 없다. 그것은 후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