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5
0
조회 171
2013.05.06 20:25
[박래부 칼럼] 언론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확장시키는 기관임을 명심해야
탁월한 문장가 장 그르니에의 ‘침묵’이라는 수필에 소개된 일화다. 1963년 런던에서 ‘침묵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다. 수백 명의 음악 애호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헝가리 피아니스트가 쿠펜하이머의 ‘침묵 속에 파르티타’와 베르가모의 ‘지리학적인 침묵’ 등을 열광적으로 연주했다. 고요함 속에 연주가 펼쳐졌고, 콘트라베이스와 플루트도 가세해 소리 없는 삼중주를 펼쳤다.
이 연주회는 처음부터 한 언론인이 계획한 사기극이었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고자 했다”고 털어놓았다. 음향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을 반대인 침묵으로 뒤집고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언론인의 생각처럼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풍자가 통렬하지는 않다. 오히려 독창적인 것을 기대한 관객의 선의가 배신당한 것이 씁쓸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MB정권과 언론, 그리고 ‘침묵의 사기’
하필 언론인이 기획한 이 연주회는 그러나 망외의 교훈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침묵해선 안 될 때 침묵하는 것은 사기극’이라는 아픈 가르침이다. 장 그르니에는 “침묵은 행동이다, 그것도 나쁜 행동이다. 항상 공개적으로 항의해야 한다. 침묵은 악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또한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거나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공적 사안에 대해 침묵하거나 의사 표시를 기권하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의 언론 자유는 추락했다. 국제 언론감시 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가 올 초 발표한 ‘2013년 언론자유 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언론 자유는 또한 2년 연속 나빠졌다. 한국은 참여정부 때인 2006년 31위로 최고를 기록했으나 올해는 179개국 가운데 50위로, 전년보다도 6단계 하락했다. 언론 자유가 제한당하거나 증발하는 사회가 되면, 대중은 침묵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명박 정부 이후 석연치 않은 천안함 침몰사건이나, 주요 선거를 앞두고 발표되곤 하는 검경의 야당에 대한 중상모략 등을 보면서도 우리는 무기력한 침묵에 길들여져 왔다.
다행이 최근 우리 사회의 침묵이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에 의해 깨졌다.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대선 개입의혹 사건을 총괄 수사했던 그는 초기부터 경찰 고위층의 지속적인 사건 축소·은폐 정황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축소·은폐 뿐 아니라 수사 중간발표를 서둘러 한 시점과 권 과장 개인에 대한 위협 등을 밝혔다.
진선미 의원은 지난달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으로 국내정치에 적극 개입하고 여론조작을 시도했으며, 사실상 MB정권의 전위부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입수됐다”고 폭로한 바 있다. 다시 권 과장에 힘입어 경찰 또한 대선에 영향을 주기 위해 가장 민감한 시점에 기만적인 국정원 여직원 수사 중간결과를 국민 앞에 내놓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자신의 직업윤리에 충실하고 경찰로서 사명감을 보여준 권 과장의 당당한 용기가 가상하다.
국정원 정치개입 자체가 국가기강을 뒤흔드는 범죄일 뿐만 아니라, 박근혜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지난 대선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실제로 권 과장의 폭로 이후 시민들은 ‘박근혜 당선무효’ ‘부끄럽다 부정선거!’ ‘국정원을 국정조사하라! 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우리는 언제까지 주요 선거 때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해서 여당을 유리하게 하는 기만과 야만을 묵인해야 하는가. 지난 2008년에도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민간인 불법사찰을 통해 YTN 사장에 대한 언론사 인사에 관여했다. 1987년 6월 혁명 이래 우리는 민주 국가를 이뤄왔다고 믿었지만, 어느덧 민주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내면적으로 인권과 언론 자유가 추락하고 경찰국가화하는 참담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국정원 축소·왜곡보도 통탄스럽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국제 언론을 감시하는 것은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지만, 그 평가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다. 우리 사회는 보수·수구언론 위주로 지형 자체가 크게 기울어 있기 때문에, 늘 공정보도와 진실보도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 평가에서 정파성 짙은 편향보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언론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도 제대로 짚어지고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경찰 수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전 언론이 나서서 추적하고 탐사해야 할 국가적 중대 사안인데도, 조중동 등은 ‘내부 갈등’ 등으로 의미를 축소하고 왜한 채 보도하고 있다. 침묵을 깨야 할 언론이 침묵을 조장하거나 진실을 비트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언론은 주요 사안일수록 침묵해선 안 된다. 언론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책임을 고의로 피하거나 왜곡할 경우 언론의 협잡일 수밖에 없고, 권력의 악은 반복된다. 언론의 침묵으로 인해 국민 사이에 불감증과 무신경이 만연하여, 이윽고 그들을 철학과 정의감이 없는 한낱 우민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새언론포럼 회장)
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080
꽃이 져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