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당대표로 이념적 지향이 모호한 김한길 의원이 뽑혔습니다. 민주당 당원들과 이해당사자들이 뽑은 대표이니 그의 정치적 정당성에 이론을 제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들끼리 모여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겠다니 그들이 알아서 정치를 해나겠지요. 거기에 추호의 숟가락도 얹을 생각이 없습니다. 오늘부로 필자는 33년에 걸친 민주당 지지를 철회합니다.
▲ 진보적 가치를 포기한 민주당의 우향우
정당정치의 대가로 알려진 샤츠슈나이더는 정당은 갈등의 범위를 키워 개별 이익을 사회화(공적 이익으로 키우는 것)하는데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했습니다. 헌데 정치의 근본인 갈등 구조를 계파의 문제로 치환하고, 모방일 투표의 축소처럼 대표의 정당성을 일반 지지자들에게서 당원 중심으로 좁힌 정당을 지지할 이유가 더 이상은 없습니다.
거대한 정당에는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고 계파라는 것도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당연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파나 조직이 없는 자신이 대표가 됐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반정당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자가 당 대표에 오르게 됐으니 평생을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민주당 지지를 철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당의 문제는 계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계파가 어떤 갈등을 대변하고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갈등의 범위를 축소함으로써 경쟁의 정당성과 참여의 가치를 훼손하고 이념에 기초한 공익의 실현이라는 정당의 영향력을 스스로 축소하는 민주당에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들이 취할 이념의 수준이란 중도로 포장된 우향우 외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과의 평등에 최선을 다하는 진보적 가치를 포기하고 갈등의 사회화를 축소한 정당이란 상류층과 자본 편향적인 개인민주주의의 추종밖에 선택할 영역이 없습니다.
▲ 중도란 민주주의 정치에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치란 갈등의 규모를 최대화해 누구나 정치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게 보장하고, 다수결 원칙을 최고 결정원리로 받아들이되 만장일치라는 전체주의적 결정을 원천봉쇄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르고, 그들이 처한 환경도 똑같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 인간이 추구하는 이익이란 동일할 수 없는데, 여기서 갈등이 발생하고 그 갈등에 참여하는 숫자를 늘려 개별 이익을 사회화하는 것이 민주주의 체제의 정치입니다.
따라서 가치 중립적인 단어인 중도란 존재하는 갈등을 일정 부분 해결하기 위해 자원의 동원과 공정한 분배를 결정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영역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특정 사안 별로 이중이념적 행태(보수와 진보를 사안 별로 지지하는 것으로, 중도가 아닌 중용의 묘라 할 수 있다)를 보이는 것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진영 논리를 부정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갈등을 전체주의적 통합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과 동일한 말입니다, 이를테면 작금의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정치행태처럼.
민주주의의 근간 원리인 자유와 평등이 동일하게 얘기되는 것도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경쟁하는 갈등의 완벽한 해결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민주주의 이론가 중에서 중도라는 개념을 정의내린 사람은 없습니다. 도(道)란 가치의 지향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길과 도로에도 좌측 통행과 우측 통행이 있듯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갈등 해결을 위한 중용적 접근은 가능하지만 중도적 접근이란 기회주의적 접근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습니다.
▲ 진보적 가치를 포기한 민주당
갈등의 집단화와 이익의 집단화는 다른 말입니다. 갈등의 집단화는 개인의 차원에서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통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이익의 집단화는 협소한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숫자가 아닌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특히 상류층이나 대기업들의 집단화는 쉽게 이루어지지만 추구하는 이해가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집단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특수 이익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익과 충돌나는 문제들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소송의 증가는 정치의 역할을 급속도로 약화시켰습니다. 갈등의 최종적 해결을 정치적 행위가 아닌 법정 대결로 가져가면 자본에서 우위를 보이는 특수 이익집단들이 전직 고위관료들의 즐비한 거대 로펌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초국적기업들의 먹튀가 빈발하고 투자자 국가소송제를 악용하고 역외탈세가 만연한 것도 정치의 축소가 만들어낸 사적인 결과들입니다.
1% 대 99% 사회라는 말이 과장돼 있다고 해도 1%가 그들의 이익을 실현시키기 위해 집단화하는 것을 99%가 집단화하는 것에 비해 산술적으로만 봐도 최소 99배는 쉽습니다. 하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권력 및 기회를 독점하고 있는 1%의 집단화란 99만 배 쉬울 수 있고, 따라서 갈등 해결을 위한 자원과 분배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합니다.
민주당의 우향우는 이런 현상을 심화시킬 것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가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 한 것 때문에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김한길의 민주당은 공개적으로 우향우를 선언한 상태입니다. 진보적 가치에서 그만큼 멀어진 정당이 김한길의 민주당입니다. 정체가 너무 모호한 중도를 핑계 삼아 우향우를 선택한 민주당은 유신시대의 충실한 야당의 부활 또는 새누리당 2중대의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다당제를 향해서
이익집단에게 휘둘리기 쉬운 양당제의 폐해를 최대한 억제하고, 최대한의 다수에게 서로 상충될 수 있는 개별적인 이익을 조정해서 한정된 자원을 상대적 약자 위주로 분배하는 것이 진보적 가치이며 민주적 좌파의 존재 이유입니다. 민주주의가 개인화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갈수록 불리하게 작용하고, 이념을 실현하는 정당이 행정적 조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갈등의 규모를 키워서 숫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다당제가 민주주의 실현에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갈등이란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다양할 수밖에 없고 이를 실현하려면 다양한 갈등을 제도권 정치에서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많아야 합니다. 기득권화된 양당제의 공고화는 필연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갈등의 범위가 줄어들게 되는 대신 정치적 투쟁은 격렬해집니다. 이는 미국과 일본, 한국에서처럼 민주주의의 축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양당제가 정착되면 정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엇비슷한 이익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정권을 잡기 위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국민이 참여할 공간은 없습니다.
반면에 기득권의 이익이란 보수라는 하나의 이념과 그릇에 담을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기득권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기존의 것을 지키며 더욱 늘려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지향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통치의 효율성과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갈등을 개별화하고 참여의 범위를 축소합니다. 기득권화된 양당 체제에서는 민주주의의 갈등 구조와 조정의 방식은 개인화되거나 축소되고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베일 뒤로 숨어들게 됩니다. 갈수록 특수 이익집답에 휘둘리는 정당이나 정부에게 갈수록 비밀이 많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정원 선거 개입처럼 국기문란사건이 펼쳐졌음에도 이것이 이슈화되지도 못하고, 60년 전통을 운운하는 제1야당이 당의 강령에서 '한미FTA 전면 재협상'이나 '촛불 정신' 같은 진보적 가치를 포기한 민주당 전당대회를 보며 축소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김한길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오늘부로 철회합니다. 정당정치의 대가이자 평생을 진보적 가치에 전념해온 샤츠슈나이더가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주장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번 글을 마칠까 합니다.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시민권과 이들의 지위를 둘러싼 논쟁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모든 조치가 의미를 갖는 것은, 갈등을 가시화하려는 시도와 결부될 때이다. 범위의 문제는 이들 논의에서 핵심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