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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3
2013.05.01 10:45
저번주가 결혼기념일이어서
가족들과 함께 한옥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음식점도 예약하고
아내한테 줄 편지까지 써서
결혼 이후 정말 드물게 이벤트도 나름 준비했구요.
더불어 새로 산 카메라까지 챙긴건
도시 문명 속에서 버티고 있는 옛날의 골목들을 담아보고도 싶어서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서울 나들이는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시작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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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내가 갖고 있는 의문 한 가지
난 딸아이를 사랑하는걸까? 딸아이에게 집착하는걸까?
아빠가 든든하게 서면 아이는 언제나 사랑스런 존재지만,
내가 흔들리면 딸아이의 한 마디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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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 북촌로 길로 들어서자
아내는 탄성을 지릅니다.
예전 인사동에 왔다가 엉겹결에 들러
너무 행복하게 골목골목을 누볐던 기억이 떠오른거죠.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
주차까지 마친 후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저녁식사까지는 아직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어,
우선 골목 답사를 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차안에서 잠들었던 아이를 깨워
카메라부터 들이댔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얼굴이 찌푸려진 아이를 세워 놓고
이것저것 카메라 조작을 하는 사이
잠에서 바로 깬 아이는 짜증을 쏟아냈고,
그 순간의 표정들이 스냅사진처럼 머릿속에 각인된 아빠는
당혹감을 감당치 못하고 그냥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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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1 : 아이는 날 거부했다. 사실1 : 잠에서 바로 깬 아이의 일상적 투정이었다.
생각2 : 아내는 날 싫어한다. 사실2 : 아내는 그냥 피곤했을 뿐이다.
생각3 : 저놈은 날 역겨워한다. 사실3 : 저놈은 내게 관심조차 없다.
생각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결코 사실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울감이 충만해 올 땐
주관적 생각을 객관적 사실로 믿어버린다.
갸냘픈 영혼이 자기 보호본능을 발동시켜
최악의 상황을 설정하고, 막을 치고, 벽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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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손님(우울증)으로 인해
한옥마을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동안
내내 힘들었습니다.
아이는 금새 기분이 좋아지고,
와플도 먹고, 떡꼬치도 오물거리며 시간을 즐겼지만,
이미 무너진 마음은 저녁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을 찾을때까지도
다잡아지지 않았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어색한 기운을
사람들은 "쟤 왜저래?"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본인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사력을 다해 그 순간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랍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그걸 이해할 순 없을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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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감
사람들이 이 감성 질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동정심이나 연민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에 비춰볼 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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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아내의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 좋은 날에 여기까지와서 당신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아이의 투정 하나에도 왜그러냐고~
단지 질환일 뿐인데,
조금만 견뎌줬으면 그 뿐인데,
순간 난 못난 망신창이가 되어
참담해진 몰골로 가족 앞에 버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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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혐오~
무의미~
가족 앞에서조차 무가치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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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울증 환자는
아이의 돌잔치에 가서
조크를 날린다는 것이
저 숫불에 아이를 구워먹어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그는 조크 아닌 조크를 날려 놓고,
자신의 못남과 찌질함에
또 혼자 고통받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사람들과 조금씩 격리되는 것이죠.
돌아오는 길~
기분은 한 결 좋아졌습니다.
이후 음식점을 나와
밤 골목을 조목조목 누비며
과거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았고,
그 속에 환하게 웃는 딸아이와 아내가 있었으니,
이들을 항생제로 삼아
견뎌내고 버텨내고 거듭나야 하는 것이
내 의무이자 책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