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사내 아들의) 엄마로서, 나는 이 젊은이가 왜 폭력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다. 한 젊음을 그렇게 어두운 방식으로 내모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을 구하려 하지 않은 채 단지 복수심에 사로잡혀 성급한 판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막고 미래의 비극을 예방할 수 있겠는가.”
미국 보스턴 폭탄 테러 용의자로 체포된 조하르 차르나예프와 동갑 아들을 둔 미국인 작가 시미 싱 주네야는 ‘그는 내 자식일 수도 있다’는 제목의 허핑턴포스트 21일자 칼럼에서 미국 사회에 이런 물음을 던졌다. 분노와 적의, 편견과 흥분을 벗고 보스턴 테러에 대해 찬찬히 사회적 성찰을 해보자는 주문이다.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보스턴 테러 발발 후 1주일을 보낸 미국 사회에서 사태를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경악과 분노와 보복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테러 대책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젊은 이민자 청년들은 왜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는지, 미국이 어쩌다 이런 일이 백주에 벌어지는 위험한 곳이 됐는지를 짚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테러 전문가인 조너선 화이트는 칼럼 ‘현대 테러리즘의 속성’(허핑턴포스트 19일자)에서 속보와 오보가 춤추는 언론보도를 겨냥해 “미디어와 언론 소비자는 소설에서 벗어날 때”라며 “미국인은 현대 테러리즘의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일침을 놨다. 화이트는 테러리즘을 전쟁으로 간주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시각으로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의 수단인 현대의 테러리즘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국 대테러 전문가 마이클 클라크는 미국이 자생적 과격분자의 활동을 선제적으로 제어하려는 노력에 소홀한 것이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22일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미국인들은 이슬람 테러리즘이 미국 안에서 발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여전히 꺼리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클라크는 보스턴 테러가 이 같은 미국의 전략적 실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안보 강화에만 집중되면서 자생적 테러리즘의 온상을 제거하는 노력이 미흡했다고 보는 것이다.
스위스 안보연구센터의 로렌조 비디노 박사는 칼럼 ‘차르나예프 형제 이해하기’(허핑턴포스트 20일자)에서 테러의 동기와 체첸 출신의 관련성을 추적했다. 비디노는 차르나예프 형제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것은 체첸이나 그로즈니가 아니라 청년기의 10년 이상을 보낸 보스턴의 길거리나 인터넷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들이 체첸 출신이라는 점은 테러의 동기를 규명하는 데 하나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비록 이들 형제의 이념이 외생적일 수는 있어도, 테러리스트가 된 것은 자생적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시미 싱 주네야도 칼럼에서 이민자로서 미국 사회에서 받았을 편견을 언급했다. 그는 조하르의 수배 보도를 보면서 그와 닮은 자기 아들이 감내해야 할 불신의 눈초리를 걱정했다. 조하르에 대해 쉽사리 정파적 편견을 드러내는 온라인의 언어폭력에 대해서도 역겨움을 표시했다.
차르나예프는 조국 체첸에서도, 이민지 미국에서도 버림받은 ‘이중 추방자’일 수 있다는 연민을 드러냈다. 그는 칼럼을 ‘누구나 내 자식일 수 있다’고 끝내며, 공공선과 우애의 회복을 촉구했다.
미국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에 대한 분석도 시도된다. 테러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데에는 이념적(종교·정치)·심리적(사이코패스, 인지부조화)·개인적 보복 등의 요인이 작용할 수 있지만, 이보다는 ‘구조적 불의’가 이번 테러의 뿌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용의자 형제는 경제적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핑턴포스트 발행인인 아리아나 허핑턴은 보스턴 테러 다음날인 지난 16일 칼럼에서 일자리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다. 그는 보스턴 테러가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일자리 위기는 긴급뉴스(Breaking News)가 아니라 절망적인 이야기(Broken News)”라고 지적했다. 그는 양극화와 절망적인 일자리 위기를 보스턴 테러의 뿌리로 본 셈이다.
3)단지언니생각 :
상기 1)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인간사회는 왜? 이토록 극단적 혼란과 정신적 도착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 추구하는 문명(물질)의 발전과 문화(정신)적 향상의 내면적 괴리에서 충돌하는 물리적 결과(현상적 결과라고 해도 좋음)는 아닐까?
위에 미국사회가 자탄하는 것처럼, "미국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의 문제제기는 결국, 인간세상에 공통적으로 팽배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