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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8 15:29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과 정치 검찰, 국세청과 감사원처럼 권위주의 정권이 남용했던 국가권력기관을 통한 행정 악을 줄이기 위해 절차적 민주주의 구축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국정원장과는 만나지 않았고 재임 중 두세 차례의 만남에서도 동석자를 반드시 참석시켜 권력기관을 이용한 수월하지만 반민주적인 통치를 배격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국정운영 시스템을 확실하게 세워두면 최고 권력자가 통치의 수월성과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권려기관과 관료들을 행정 악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청와대의 ‘e-지원시스템’처럼 투명한 국정운영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 대통령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습니다. 행정 악으로서의 정부와 필요악으로서의 정부는 하늘과 땅 만큼 커다란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 독재자도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집착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바로 그 절차적 민주주의 때문에 퇴임시의 지지율이 바닥을 칠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정치적 지지 세력이 확실하지 않았던 노 대통령에게 권위주의 퇴출을 위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은 힘없는 대통령의 전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개혁의 열망이 넘치는 정권이었지만 제대로 된 개혁 하나 이루지 못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특히 공익을 사익화 하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이명박이 대통령에 오름으로써 이 모든 노력이 단숨에 무너져 내립니다. 아무리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고히 했다고 해도 최고 지도자가 그것을 지킬 의지가 없다면 시스템은 무용지물로 전락합니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모든 권력의 속성이기 때문에, 조직의 장이 행정시스템을 악용하고자 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네그리의 책으로 기억되는데 ‘독재자도 얼마든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문장이 있습니다. 독재자도 정책을 집행하려면 국민적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소수의 지지에 그칠지라도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보의 투명성, 즉 절차적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치가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만인에게 불평등한 법치주의와 국가권력기관의 사적 이용을 통해 독재정치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시스템이란 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어도 사용하는 자에 의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습니다. 결국 최고의 문제는 사람에 있는 것입니다.
▲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마이라 맥피어슨 교수는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All Governments Lie)”고 말했는데 하물며 “이 정부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The Governments Always Lie)”는 수준에 이른 MB정부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노무현 정서에 힘입어 대승을 거뒀지만 초기 인사 실패로부터 촛불집회에 이어 명박산성까지 국민적 탄핵을 받기 직전까지 몰렸던 것은 노무현의 그림자가 그만큼 컸던 것을 뜻합니다.
사실 이명박은 노무현처럼 정치적 지지 세력이 없는 주변부 정치인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볼 때 이명박은 박근혜보다 노무현에 가깝습니다. 그런 이명박이 국정 운영 능력 면에서는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투명한 국정운영 시스템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일상화한 노무현의 모습과 비교됐던 것이 그의 몰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식으로 이어지며 모사재인성사재천(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이란 예상할 수 없는 결과의 의외성을 창출했습니다. 반노무현정서로 대통령에 올랐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집권 초기부터 레임덕에 빠졌던 이명박의 정치 역정은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란 끈이론의 대가인 물리학자 서스킨드의 말에 정확히 일치합니다.
▲ 초록은 동색일까, 청출어람 청어람일까
이명박에 이어 18대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흥망성세를 지켜보면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인사 문제와 불통의 정치만 놓고 보면 이명박의 재판이라 초록은 동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실족은 시스템의 부재보다 이를 이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가 초래한 사고로 보입니다.
즉 지도자의 행태가 시스템의 작동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대화 제의와 그 번복에서 보듯 기존의 시스템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으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명박의 레임덕이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의해 더욱 가속화됐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한미정상회담을 20일 정도 남겨두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인사가 마무리된 현 시점에서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초록은 동색일지, 아니면 청출어람 청어람일지가 어느 정도 결정될 것 같습니다. 원전마피아의 배만 불려주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문제만 제외하면 한미 간에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별로 없지만, 북한의 도발로 해서 미국에게 갚아야 할 할 빚과 이자들이 제법 되기 때문입니다.
▲ 행정 악과 필요악 사이에서 열리는 한미정상회담
박근혜 정부가 한미정상회담 이후로 반(反)박근혜 정서를 보이는 국민들을 향한 대반격을 가할지도 모르지요, 이명박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 정부가 국정운영 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국가권력기관과 국정운영 시스템을 이용한 행정 악의 부활을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언론의 보수화와 사회의 우경화가 상당히 이루어진 현실에서 제1 야당이 역사상 최고로 무력한 상황까지 고려하면 행정 악의 부활을 막을 방도는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소극으로 두 번 되풀이 된다”는 경구처럼 대한민국은 격렬한 분열과 탄압 및 저항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겠지요. 보수화 메커니즘이 창출하는 대한민국 특유의 집단적 망각이 작동하면 국민들은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족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겨우 박근혜 정부가 52일 지났는데 520일을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이 최악의 지옥일지, 차악의 지옥일지 판가름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직 장악을 위한 인사를 마친 박근혜 정부가 한미정상회담의 결과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어떤 카드를 꺼내드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은 행정 악과 필요악 사이에서 요동칠 것입니다.
손가락을 꾸욱 눌러주면 박근혜 정부가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