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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0 19:44
나는 이념적으로 진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 사회적 포용과 박애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0.1%에 이르는 극소수의 통치엘리트에 대항해 절대다수의 난장이들을 편에 서서 생각하고 저항하며 연대하고 분노하며 행동하는 것이 진보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진보가 인류의 전 세대를 걸쳐 특권화된 기득권과 충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무장한 물리적인 힘에 맞서 말이라는 구호와 혈혈단신으로 맞설 수 있는 것도, 다수결원칙을 내새워 소수의 의견을 무력화시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도, 불의가 득세한 세상에 대해 분노하며 저항할 수 있는 것도 진보가 추구하는 이상이고 행동의 황금률이며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나는 지금 절대온도인 영하 273도의 냉철함으로 이성의 얼음집에서 수없이 단련해온 직관을 끄집어내 미친 듯이 들끓고 있는 용암 같은 분노를 다스리며 글을 쓰고 있다. 비록 이 글이 거대한 기득권 세력의 단단한 철갑 속에 숨어 진보의 가치를 죽이고 있는 두 명의 적에게 티끌만한 흠결도 낼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만년한철의 돌덩이로 굳어진 강철 같은 두 적의 표면에 LP판의 홈을 따라 도는 미약한 바늘의 움직임처럼 미세한 흠이라도 남길 수 있다면 내 생명의 혼불을 지펴서라도 반드시 해내고자 한다. 죽어서 생을 돌아 볼 때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기 위해 두 명의 적에게 진보의 이름으로 미력한 일격이나마 가하고자 한다.
▲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21세기에 들어 진보의 가치를 말살하고 있는 첫 번째 적은 민주당 대선평가 결과보고서를 작성한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기득권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문제의 보고서는 그 편향성과 지향점이 제1야당이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민주당의 인위적인 세대교체와 특정 세력들을 위한 인격 살인에 다름 아니다.
1950~60년대 미국 월가에서 세대교체 붐이 일 때 대공황을 경험한 세대들이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세대가 사라지면 대공황의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이번 대선보고서는 386세대들에 대한 정치적 사형선고를 위해 작성된 판결문이라 이로써 유신시대 반독재투쟁에서 시작해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주역들의 기억도 함께 매장되는 운명에 처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정당한 세대교체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특권화된 기득권에게만 해당되는 불사의 능력이다. 허나 세대교체가 자의적이고 표적 공격의 성질을 뗬을 때는 노장들의 생생한 기억과 묵직한 경험의 산물까지 모두 다 잃어버린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듯이 미래도 과거의 연장이지 돌연변이적 비약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유신시대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가 대통령에 오를 정도로 현재의 대한민국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유신시대의 잔재들이 하나둘씩 부활하고 있는 시점에서 국가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좌절 및 승리의 DNA로 가득 찬 세대들을 일거에 쓸어버리겠다는 이번 보고서는 민주당의 보수화를 위한 거대한ㅡ그러나 너무나 형편없어 삼척동자도 눈치챌 수 있는 어리석고 저급한 음모의 전형이다.
이번 보고서를 보고 미친 듯이 웃고 있을 특성 인물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온 과정이 기회주의적이어서 특정한 이념적 무장도 없고,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에 미쳐 장삼이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자들의 가증스러운 얼굴 말이다. 친노를 빙자해 특정 인물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이번 보고서는 지적 함양을 대국민 사기질에 써먹는 이들을 위한, 이들에 의한, 이들의 일방적인 보고서다.
서울대 명예교수인 한상진은 그의 이력서에 찍힌 것들로 해서 “가장 공허한 형태들조차도 권위의 무게를 가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이번 보고서는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대혁명』을 집필한 알렉시스 토크빌의 자세와 노력, 성찰에 비하면 너무나 형편없어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는 지금 대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열정에 크게 감염되지 않을 정도로 대혁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대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대혁명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혁명들은 성공할 경우 그 혁명을 낳은 원인들을 일소해버리게 되며, 따라서 성공 그 자체에 의해 이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대선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었고 안철수 현상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국민의 48%가 압도적인 환경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문재인 후보를 찍었는지 그것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특정 세력에게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는 국민의 48%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린다면 이번 보고서는 ‘하늘에서 국민의 48%를 흩어본 후 작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평가가 오류투성이로 가득하고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민주당을 지지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배반한 일방적인 결론으로 가득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첩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한상진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만 충실했을 뿐이다.
그래서 한상진이 2013년의 진보를 죽이는 첫 번째 적에 이름을 올렸다.
▲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대근
오늘(10일)자 경향신문 1면 사진을 보라. 제목이 “고민 담긴 대통령 발언 자료”이다. 경향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사진은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 문제에 관한 발언을 수차례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진이다. 당연히 청와대에서 나누어준 사진을 그대로 1면에 실은 것이다.
사진 바로 밑의 기사 제목은 “문재인·이해찬·박지원 대선 패배 책임져야”이다. 경향신문의 노무현과 친노에 대한 비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므로 이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겠다. 헌데 진보매체를 자처하는ㅡ아니 자처했던 경향신문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글로 유명한 이대근이 편집국장으로 간 다음부터 깨놓고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북한에 대한 이중 잣대의 변절도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사태 때도 중립적 자세를 잃지 않던 경향신문이 작년 말부터 종중동문과 거의 다를 것이 없는 북한 인권관련 특집기사를 쏟아내더니, 전쟁 위협이 최고조에 이르자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아주 조금 비판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이도저도 아닌 양비론으로 돌아섰다. 마가렛 대체의 죽음과 평가에 대해 양비론적 기사로 일관하는 것처럼. 물론 2008년 미국 월가 발 금융위기 터져 나왔을 때부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기획들을 쏟아내는 중에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마가렛 대처총리를 얼마나 비판했는지는 경향신문을 몇 년 이상 이어온 독자라면 누구나 안다.
차라리 보수를 선언하며 거기에 올인하면 그나마 낫다. 기사와 칼럼, 사설을 통해 철지난 진보의 논리들을 나열하는 이중성은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다. 가끔 가다, 가뭄에 콩 나듯이 민주당 소식이 실리면 하나같이 친노와 특정 인물을 죽이는 내용들이다. 반면에 새누리당 관련 기사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가치의 선택에 중도란 없음을 모르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경제란의 변화는 가히 극적이다 못해 조중동문 수준이다. 삼성과 현대차 관련 기사가 넘쳐나고 나머지도 SK, LG, 포스코, KT, U+같은 대기업 소식이 차지한다. 아무리 광고가 간절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경제란이 천지개벽할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부동산과 주식 관련 기사들은 왜 이렇게 넘쳐나게 됐는지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없다.
이런 현상은 이대근이 편집국장으로 간 다음에 집중적으로 늘어났다. 악착같이 경향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필자는 경향신문이 언제 커밍아웃을 하는지 그것을 보기 위해서다. 개인이 역사와 시대를 증거하는 것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 진보매체의 선두주자 중 하나라는 경향신문의 변절을 통해 대한민국의 우경화를 이끌고 있는 일등공신 중 한 명이 이대근 편집국장이다.
그래서 이대근이 2013년의 진보를 죽이는 두 번째 적에 이름을 올렸다.
물론 둘의 이름이 올라간 비망록은 나만의 것이다. 보고서에서 이해찬과 박지원의 문제를 거론한 것과 문성근의 무능함을 지적한 것에는 동의한다. 민주당에 인적 교체가 필요하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경향신문의 변화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보수환된 언론 환경에서 먹고 살아야 하고 극단적 분열의 문제인 나라라고 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깨달음이 있어 신념과 행동 전체를 탈바꿈시켰다면 모를까, 이 둘의 행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진보의 이념이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약자들을 위해 나를 버릴 수 있음에 있다면 이 둘의 행태는 진보적 가치를 말살하는 적임에 분명하다. 2013년의 민주당과 경향신문의 중심에는 이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