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공공의료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물질적 가난과 육체적 빈곤 상태에 처한 분들을 치료해주느라 당연히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는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폐업시키려 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고집을 보고 있자면 개발이익에 눈이 돌아 세입자를 옥상으로 내몰고 끝내는 사회적 살인을 당한 용산참사의 철거민들이 떠오릅니다.
현재 진주의료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은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는 화염 속에서 자본주의 탐욕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처했지만 자신의 병을 치료할 돈이 부족해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의 도움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에서 인용
적자를 이유로, 그것이 경상남도의 재정에 악화를 준다는 이유로 가장 미약한 자들의 최후의 희망마저 짓밟아버리겠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어떤 체제와 상황에서도 돈으로 환산해 그 생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신념이 아무리 옳고 행정적 정당성이 있다고 해도 한 인간의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재정적인 이유로, 즉 탐욕의 정수인 돈이라는 가치로 어떤 행정적 조치의 근거로 삼는다면 인간의 생명이란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개 상품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인간이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해 만물의 영장에 자리에 오르거나, 신의 모습을 본 떠 창조된 유일한 생명체인 것은 그 생명의 침해불가한 존엄성 때문입니다.
재정적자에 대한 홍 지사의 경제적 근거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폐업한다면 그것 또한 사회적 살인에 다름 아닙니다. 미래의 일이란 아무도 모르고 그래서 하루아침에 극빈층으로 전락할 수 있는 나와 내 가족들, 후대의 자손들에게 최후의 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오직 재정적 이유 때문에 제거해버린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국가가 신성불가침한 권리를 갖는 것은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며 지방자치제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 것도 주민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가장 힘겨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부터 적용되는 것이며 헌법적 가치로 적시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이것을 거역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국가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홉스조차도 자신의 생명권이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면 국가를 부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지방자치단체야 말해 무엇 하겠으며, 임기가 정해져 있는 단체장이야 더더욱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인류의 역사가 조금씩 진보해오고 그 방향성이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통한 행복의 보편화에 있다면 지금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보여주고 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태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인용
가장 힘겨운 처지에 있는 주민을 살리지 못하는 단체장이 어떤 주민인들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재정적자의 이유로 박탈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짐승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미개인에 불과합니다. 문명의 발전이 어찌 가진 자와 강한 자들의 탐욕과 욕망만 반영하는 것이겠습니까?
같은 사람으로서, 인간의 생명만큼 존엄한 것도 없으며 신성불가침한 권리도 없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문명인으로서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부탁드립니다. 아니, 경고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당신의 생각을 거두어들이십시오. 누군가의 존엄과 행복을 박탈한 돈으로 단 한 줌의 이익이라도 내게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어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주민에 의해 오른 도지사라는 자리가 주민의 뜻에 반하는 것까지 행하는 절대 권력의 지위는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며 인류 문명의 정신과도 부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도지사로서 가장 낮고 가장 비천한 위치에 있는 주민들부터 돌보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에 반하는 어떤 행정 집행도 역사와 민심의 심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같은 하늘 아래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운 하루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