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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9 20:17
사이버 테러를 당한 보도전문채널 YTN이 전쟁 위협을 극대화하는 가운데 대선 승리 이후 잠시 동안 여유를 보여주던 종편들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경고등을 울릴 정도로 추락하자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MBC의 정상화의 핵심 키를 쥐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신임 이사장이 박근혜 측근으로 임명됨에 따라 MBC의 정상화는 물 건너 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예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한 듯한 KBS는 MBC의 과속질주가 부러웠는지 슬슬 권력의 치맛자락 아래로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뉴스나 시사프로그램들의 탈선과 연성화는 막장이란 단어가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권력의 감시견으로서의 방송이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나 회자됐던 신화의 일종이었나 봅니다.
한국일보에서 인용
다음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보면 우리나라 언론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고 보수화되어 있는지 설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옮기기에는 분량이 많아 책에 나오는 핵심 부분만 발췌했습니다. 최근 들어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언론환경의 보수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정치는 언론이 움직인다...정치는 정당에 의해 주도되기 이전에 언론에 의해 틀이 짜인다. 정책 어젠더와 이슈를 설정하는 것도 언론이다...정부의 업적, 정당의 업적, 정치인과 관료 개개인의 업적을 평가하는 언론의 정치적 기능은 막강하다.
또한 언론은 준사법적 기능을 한다...정당과 의회 자체의 정화 기능이나 검찰과 사법부의 결정은 그 이후의 일이며, 대체로 그것은 사건을 정리하는 단계에서의 절차일 뿐이다...언론은 한 개인의 정신과 내면의 영역까지 임의적으로 개입하고 판단해 ‘좌파’니, ‘사상이 의심’스러우니 하는...‘사상 검증’을 자유롭게 해댄다.
법원의 결정이 민주적 규범과 상응하지만 정부 정책 및 보수적 여론과 상충할 때에는 법원의 존립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훈계한다. 사법부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초법적 태도를 보여 주는 경우도 많다...언론의 영향력은 국가를 능가할 정도가 되었지만 언론에 대한 시민적 통제의 여러 시도들은 이른바 ‘언론의 자유’를 마치 천부인권처럼 들먹이는 거대 언론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은 일반화된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현대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은 대기업화된 거대 언론이(다)...한국에서 언론의 문제는 세계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라고 본다. 매우 동질적인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갖는 언론 대기업에 의해 여론 시장이 독점되어 있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별도의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정치가 언론의 보도에 따라 움직일 때 민주주의는 기득 헤게모니 구조로부터 자유롭게 사회 공동체의 여러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이상의 발췌분은 많은 분들이 공감하리라 생각됩니다. 대한민국이 수없이 많은 희생의 대가인 ‘민주정부 10년’을 거쳤음에도 꾸준히 보수화가 진행된 것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성장해 언론시장을 독점한 보수 언론이 정치와 경제 및 사회적 의제와 담론들을 선점해 ‘민주정부 10년’의 개혁적 조치들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혁의 동력을 상실한 ‘민주정부 10년’의 파워엘리트들은 개혁적 자유주의에서 좌파 신자유주의 사이에 위치한 중도보수적 정책들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의 개혁 동력에 빨간불이 켜지자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된 민주당(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포함)은 ‘충성스런 야당’의 역할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특히 보수언론과 사학재벌, 친일인사처럼 반칙과 특권을 이용해 기득권에 오른 집단과 세력들에 대한 개혁 의지가 강했던 참여정부가 보수 세력의 의회쿠데타인 탄핵을 당하면서 급속도로 무기력해지는 모습과, 개혁의 동력이 상실됨에 따라 한미FTA처럼 수출 대기업 위주의 통상정책까지 펼친 것은 한 편의 소극을 보는 듯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비극으로 한 번, 소극으로 한 번 역사는 두 번 되풀이 된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겨레신문에서 인용
제도권 거대 양당이 정책과 이념적으로 대동소이해지면서 변별력이 사라진 제도권 정치판은 국민과 유리된 채 보수 정당 간의 정권 창출을 위한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됐습니다. 보수화된 양당은 영남과 호남을 식민지로 정권을 주고받는 가운데 기득권을 형성해서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하게 됐는데 이는 권력의 감시자인 언론의 직무유기와 사적 이해의 담합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이런 환경 하에서 탄생한 보수적 사회 진화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 수많은 문제를 갖고 있는 이명박이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국가 전체의 보수화가 얼마만큼 진행됐는지 알 수 있는 전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국가의 최고지도자에서 빈곤층의 보수화까지 대한민국 전체가 우경화로 돌아서자 정치는 타락을 거듭했고 그에 따라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혐오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습니다.
이런 정치 혐오 현상은 보수화된 사회에 불만이 많은 2030세대와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투표 불참으로 이어졌지만, 자신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보수적 유권자들의 투표율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보수적 유권자들의 한 표가 총유권자 대비 한 표 이상의 힘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당선자의 낮은 득표율은 정치적 정당성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고 정치의 질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졌습니다.
국가 전체를 우경화하는 보수화 메커니즘은 이런 과정을 통해 돌아갑니다. 공영방송의 옷을 입은 채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KBS와 MBC가 종편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뉴스를 내보는 것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순치(네이버가 대표적)에서 우리는 언론 환경이 얼마나 보수화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 편향성과 상업화 및 선정성 강화는 보수화 메커니즘의 부산물이며 언론사 조직의 보수화와 임직원들의 저널리즘 포기는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막강한 언론과 대형 포털의 의제 선정과 편향성에 따라 사회가 보수화되면 거대 양당과 정부는 민주주의의 핵심가치인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에 목숨을 걸 이유가 사라집니다. 덩달아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사익추구도 강화됩니다. 이렇게 거대 양당과 정부가 국민에게서 멀어질수록 진보적 가치는 고사되고 폄하되며 국가 전체의 보수화는 탄력을 받게 됩니다.
미디어학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마살 맥루한으로부터 수많은 언론학자들이 가장 경계했던 것도 언론의 보수화(상업화와 선정성 강화, 소유의 집중, 권력과의 밀착, 저널리즘의 부재와 축소 등)였습니다. 이런 추세는 전세계적으로 비슷하지만 그 정도 면에서 한국은 공정한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로 보수적 편향상이 심화됐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구체적 근거도 내놓지 않은 채 방통융합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우경화를 저지하고 언론의 공정성을 확보해 공론의 장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으려면 뉴스타파와 같은 대안언론의 전국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행히 해직 언론들을 중심으로 뉴스타파 같은 대안매체들이 전국방송을 목표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미약하지만 상당히 긍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칭 국민TV 창립총회ㅡ기자협회보에서 인용
방송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대안방송의 자본금을 개인의 투자액수와 상관없이ㅡ주식 수에 상관없이ㅡ1인1표의 원리로 운영되는 협동조합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제도권 언론이 1원1표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방송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었던 것과 비교하면 1인1표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송 사상 처음으로 중도 해임된 김재철이 퇴직위로금 3억여 원을 챙기기 위해 자진 사퇴했다고 해도 무너진 공영방송 MBC의 정상화는 요원한 일입니다. 이미 보수화된 조직과 주요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보수적 성향의 임원들을 일시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친박계인 이경재 전 의원이 방송통신위원장으로 내정됐고 정수장학회 이사장도 제2의 최필립이 선임되기까지 했으니 말해봤자 입만 아플 뿐입니다.
위대한 고전인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망가진 방송 환경에 시달렸고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오른 박근혜도 방송 독립에 대해 별다른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지금, 언론의 공정성을 희망하는 국민들이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데 방향 설정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좋은 예시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대혁명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열정에 크게 감염되지 않을 정도로 대혁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대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대혁명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어서 토크빌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양한 언론사와 수없이 많은 결사체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때문에 미국의 민주주의(건국 초기를 말함. 지금은 미국의 언론 환경이 상당히 보수화됐다)가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분석한 토크빌의 주장처럼,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고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정권을 무조건 지지하는 국민들이 보수정권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이나 빨갱이로 모는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이 가능한 것도 무너진 언론생태계의 편향성 때문입니다. 비민주적인 그들의 행태에 대해 제동을 걸려면 공정한 언론의 보도가 뒤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사라지고 없으니 그들의 다양한 폭력들이 여과 없이 표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론의 공정성이 우편향된 대한민국의 담론구조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양한 갈등을 제도화하는 것이라면, 작금의 대한민국은 반쪽의 민주주의만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동안 불길처럼 타올랐다 일시에 꺼져버린 대안방송 설립에 관한 참여가 보다 폭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시에 너무나 미약하고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네티즌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느려 보이지만 대안방송이 기존 매체들과 겨룰 수 있을 수준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현재 뉴스타파를 중심으로 대안방송(가칭 국민TV)의 전국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진보 매체를 자처하는 신문들마저 깨놓고 보수성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 대안방송의 전국화에 대한 지지와 성원이 다시 화염처럼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편향된 뉴스와 보도들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면 TV뉴스와 시사프로그램 시청을 최소화하고 대안방송의 뉴스에 의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온갖 실정과 탈법들을 역사의 법정을 넘어 현실 법정에 세우고 현 정부가 비슷한 길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대안방송에 대한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이 필요합니다. 술 한 번 덜 먹고 데이트 한 번 줄이면 가능한 작은 금액이라도 대안방송의 전국화에 투자됐으면 합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안방송 하나쯤 국민들이 소유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