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지난 21일 야밤(?)에 갑작스레 퇴임식을 진행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려다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현재 행방이 묘연한 본인이나 국정원 측은 공식적으로 “미국행 계획이 없었다”고 밝혔지만, 그의 미국 출국 계획을 보도한 언론의 보도와 검찰이 출국 금지 조치를 취했다는 보도로 미루어 볼 때 그의 미국 출국 계획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2012년 초에 이명박 정부 아래서 암암리에 민간인 사찰이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 밝혀지자 당시 언론과 야권은 이른바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며 검찰에 확고한 수사를 촉구했었다.
이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명칭은 지난 1972년 6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당시 닉슨 대통령의 측근들이 닉슨의 재선을 위하여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 체포된 이른바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의 한국판이라는 의미이다.
이 ‘워터게이트’ 사건은 결국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1974년 8월 8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흔히들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이 상대편을 감시하려고 불법 도청을 지시한 내용이 핵심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닉슨을 사임하게 한 것은 이러한 불법 감시나 도청 시도 행위가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그 본질은 도청 시도 행위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FBI나 CIA 등 정보기관 또한 많은 민간인 사찰을 자행했다. 대표적으로 1971년 당시 몇몇 운동권 대학생들이 펜실베이니아주 '메디나'에 있는 정부 문서 보관 창고에 침입하여 ‘코인텔프로’(cointelpro)'라는 제목의 서류를 훔쳐내어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역대 정보기관이 많은 민간인들을 사찰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이 정보 서류에는 FBI 등 당시 정보기관이 1950년대와 60년대에 반국가 단체로 낙인찍힌 급진주의 그룹, 반전평화주의자,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 학생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사찰하고 있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사찰 명단에는 국내에 잘 알려진 제인 폰더, 말론 브랜도 등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존 레넌 등의 가수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흑인 인권 단체의 대표자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 사건이 터지자 국가 안보를 핑계로 발뺌하려는 정부의 은폐 기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결국 끈질긴 언론의 비판으로 3년 후에 미 의회 상하원 합동으로 '처치-파이크 특별조사위'가 구성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미국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정보자유법'(FOI, Freedom of Information)이라는 법률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사건이 오히려 미국 민주주의의 진보를 획기적으로 이룩한 계기가 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의 비화는 ‘잡아떼기의 거짓말’과 ‘물타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발생 당시에는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행정부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의 정점에 있었던 닉슨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으로 잡아뗀 것이다.
닉슨의 이러한 발뺌에는 그 당시 주류 언론들도 한몫을 했다. 당시 워싱턴 정가에만 2천여 명이 넘는 기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닉슨의 이러한 거짓 발뺌을 보도하는 주류 언론들은 극히 드물었다. 닉슨은 더 나아가 당시 미국의 검찰 격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CIA 등을 동원해 수사 방해와 ‘물타기’의 시도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불법적인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당시 알아주지 않던 지방지에 불과했던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젊은 기자는 이 사건 발생 후에 무려 201건에 달하는 지속적인 후속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결국 닉슨의 거짓말이 탄로 났고 그가 권력 기관을 이용했다는 정황마저도 드러나 그를 결국 사임케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1972년대의 미국 상황과 너무나 닮은 2013년의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
또한, 그 당시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높은 명성을 구가하는 <워싱턴포스트>지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30년 전의 미국 상황을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한국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마치 닉슨이 재선을 위해서 도청을 시도했다가 들통 난 상황과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30년 전에 있었던 상대방에 대한 도청 시도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의 발달이 이루어진 오늘날은 이른바 여론 유도와 조작 등을 작업하는 댓글 등의 시도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또한, 이 사건이 지난 이명박 정부 때 자행되었던 것이고 당선된 박근혜 정부와는 관계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나, 같은 정부 여당의 대선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도 그 본질적인 측면이 다를 것이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에서 이른바 이 ‘원세훈 게이트’는 점차 ‘한국판 워터게이트’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비슷한 정황들이 보이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대부분의 주류 언론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라는 두 언론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미국행 계획 사실을 특종 보도하면서 이 사건은 마치 <워싱턴포스트>가 처음으로 특종 보도했던 시기를 떠올리고 있다.
이후 닉슨 행정부는 당시 도청 시도 책임을 일부 실무자에게 돌리며 자신들의 몸통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이른바 '꼬리 자르기'에 주력했다. 그리고 주류 언론들도 이러한 행정부의 방침(?)을 충실히 보도하고 말았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바로 이 '꼬리 자르기'와 '거짓말의 발뺌'이 더 근본 문제라고 끝까지 추적했다.
한국에서도 결국 이러한 원세훈 전 원장의 도피성 미국행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자 행정부는 출국 금지 조치를 취해 원 전 국정원장의 미국행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질 기미를 보이자 행정부와 여권에서는 슬슬 원세훈 전 원장의 개인 비리 혐의를 흘리며 이른바 '몸통'을 숨기기 위한 ‘꼬리 자르기’에 나서고 있다.
‘발뺌’과 ‘꼬리 자르기의 물타기’가 진짜 ‘한국판 워터게이트’를 초래할 수도…
익히 언급한 대로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도청 시도에서 출발했지만 이를 은폐하고 발뺌으로 일관하고 꼬리 자르기를 시도한 닉슨 행정부의 행위가 결국 더 큰 화를 불러와 대통령의 사임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정보기관의 전직 간부가 도청 시도에 관여하고 이 과정에서 닉슨은 다시 정보기관을 이용해 이를 무마하려는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한국도 엄연히 법으로도 국가정보원(NIS)의 국내 정치 개입은 금지하고 있다. 국가정보원법 제9조는 정치 관여 금지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 관여 행위란 “직위를 이용하여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거나, 그러한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에 대하여 찬양하거나 비방하는 내용의 의견 또는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드러나고 있는 여러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는 과거 미국 닉슨 행정부의 도청 시도 행위를 넘어서는 중대한 국가적인 범죄 행위이다. 또한, 당시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이러한 작업들이 펼쳐졌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박근혜 현 대통령은 치명타를 입고 말 것이다.
하지만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보듯이 국가 정보기관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이 사건을 또다시 ‘꼬리 자르기’와 ‘발뺌’과 개인 비리 차원으로 ‘물타기’한다면 바로 거기에서 이는 치명타를 넘어서는 이른바 ‘한국판 워터게이트’ 사건이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대통령은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 누구도 현직 대통령이 하야하는 불행한 사태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이번 국가정보원의 국내 정치 개입 의혹에 관한 사건은 단지 ‘원세훈’이라는 개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난 독재 시절에서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투쟁과 열망으로 일구어낸 국가 정보기관의 ‘국내 정치 개입 금지’ 법안은 법령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의 척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되었다.
아버지 시절의 권위주의와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고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대통령! 잠시 국민을 속이려는 유혹으로 더 큰 화를 불려 오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