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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6:40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 단 한 줄의 조항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갈등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사상 초유의 방송사 전산망 마비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사이버테러의 주체로 북한이 거론되고,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돌아간 듯한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종북과 빨갱이 프레임에 근거한 것도 모두 다 헌법 제3조에서 기인합니다.
한 국가의 국민들에게 쾌적한 환경과 삶의 질을 마련해주어야 할 최상위 법률로서의 헌법이 정반대로 국민을 옥죄고, 극단적 분열을 초래하고,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투쟁의 산물이 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60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제 36년의 강제병합에서 우리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특정의 정치 세력에 의해 또는 그들 간의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지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현실적 요구를 담기 때문에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고 커다란 논쟁을” 통해 만들어져야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거의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공통의 규범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헌데 대한민국의 헌법은 해방과 함께 밖으로부터 주어졌고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 국민의 뜻에 반한 채 국제정치적 이해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니게 됐습니다. 최초의 헌법을 만들 때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시적 상황으로 여겼던 소수의 정치 엘리트들이 정치현실을 무시한 채 그들의 이해에 충실한 영토 개념을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 국가의 국제정치적 이해의 산물인 분단된 조국에 대해 당시의 정치 엘리트들은 비현실적인 미래의 희망사항을 헌법 제3조에 집어넣음으로써 극단적 분열의 씨앗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일제 36년이란 역사의 단절이 조선시대와 해방된 대한민국 사이에 끌어들인 현실과의 괴리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장벽)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1960년의 4.19혁명이 학생들 중신의 운동에서 일부 급진 세력을 중심으로 통일문제로 번져나가자 기득권 세력의 한축이었던 군부가 일으킨 5.16군사쿠데타에 의해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1980년의 ‘서울의 봄’도 학생 운동에 의해 추동됐지만 이후에 노동 운동으로 중심축이 옮아가면 급진성을 띠며 5.18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지자 군대를 동원한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종말을 고합니다.
이후 1987년의 6.10 항쟁도 학생 운동이 중심이었고 거기에 넥타이 부대 참여함으로써 전국적 저항운동을 자라나면서 마침내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권위주의 정권이 종말을 고합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중심에 있었던 학생 운동이 넥타이 부대와 노동자와 화학적 결합을 이루자, 대한민국 현대사의 최악의 정권이었던 박정희의 유신과 전두환의 군부독재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헌데 유신독재와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 운동의 의제들은 국가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보수적 양당에 의해 채택될 때만이 정책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이 현실정치에 진입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위로부터의 개혁’으로만 운동의 결과물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통일과 같은 급진성을 띠는 의제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탄압까지 받게 됩니다. 의제의 급진성 때문에 국민적 호응도 받지 못했고요.
남북 분단이 만들어낸 최대 산물이 국가보안법이듯이, 소수 엘리트 정치인의 의사가 반영된 헌법 제3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남북갈등은 물론 남남갈등까지 조장하며 대통령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것이 압축성장과 어우러져 권위주의적 정부시기에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됐고 너무나 많은 정치공작의 희생자들을 양산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조항은 보수화된 양당 구조를 정착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보수화된 기득권들이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까지 독점할 수 있는 불평등구조를 공고하게 만드는 논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 제3조 때문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헌법 조항 간의 모순적 갈등이 사회의 갈등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국민의 권리는 침해되기 일쑤였고, 민주주의의 축소와 국민의 행복추구권까지 ‘통일 담론’을 견인하는 영토 개념에 희생되기 일쑤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도 따지고 보면 현실과 괴리된 헌법 제3조가 만들어낸 모순의 정화이자 보수 세력의 작위적인 공안몰이입니다.
대선의 향배까지 가른 이 작위적 이슈화는 북한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가 각자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토한계선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북한 영토가 대한민국에 귀속되는데 무슨 영토 포기 발언이라는 정치적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북한은 UN에도 가입한 국가인데 한반도를 불법점령하고 있는 정치 집단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주적 개념까지 도출해냅니다.
헌데 한반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헌법 조항 때문에 극좌는 물론 극우의 득세를 초래했고, 항시적 전쟁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곡에 빠져버렸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절대의 가치로 정해놓은 영토 개념은 일제 36년에 대한 제대로 된 단죄조차도 못하게 만들었고 6.25라는 냉전에 대한 해석에도 일방적 해석만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보수적 해석은 기존 체제에 위협을 주는 수준에 이르면 종북과 빨갱이란 부적을 붙여 대한민국 정치판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공산주의로 내몰아 철저히 파멸시켰습니다. 여기에 연좌제까지 더해져 종북이나 빨갱이란 단어는 어떤 헌법적 가치보다도, 민주적 규범보다 우월한 영향력을 지녔고 이 땅에 제대로 된 사회민주주의나 과학적 공산주의 같은 사상의 자유라는 기본적 토론의 장조차 존립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급진성을 띠는 모든 정당과 단체, 운동은 탄압의 대상이었고 제도권 진입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억압받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래서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작년 통합진보당 사태로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급진적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영토 개념인 헌법 제3조가 그들의 존재 조건이자 파괴의 조건도 되는 것으로 작용했습니다.
헌데 국제정치적 현실로 보면 북한은 하나의 나라이며 대한민국과는 정치적 정통성이 완전히 다른 적성 국가입니다. 북한주민이란 논리도 영토 개념의 부산물인데, 통일을 절대 가치로 끌어올린 헌법 제3조는 민족적 동질성 외에는 모든 면에서 별개의 국가인 북한을 흡수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는 북한의 붕괴나 전쟁이 일어나 승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집요하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여전히 휴전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여기에 근원이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의 영토이기에 영구적 분단을 뜻하는 정전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어마어마한 국방비를 투입해 전쟁 억지라는 최악의 방식만 선택이 가능해진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너무나 심한 지역 갈등도 그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현실과 유리된 헌법 제3조에 이르게 됩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 헌법에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국가적 통일을 가져와야 할 헌법이 모든 갈등의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정치판이 국민들에게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은 빼놓지 않고 챙길 수 있는 것이지요.
한반도의 지정학적이고 국제정치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북한을 장기적으로 볼 때 통일의 대상으로 보되, 지난 60여 년 동안 모든 면에서 다른 길을 걸어온 북한을 어떤 식으로 정의 내릴지 국민적 토론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남남갈등이 극한에 다다른 지금 현실적 문제들을 반영하는 헌법 개정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입니다.
특히 영토 개념에 대한 전 국민적이고 전향적인 토론을 통해 통일의 담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처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까지 제한하는 헌법 제3조의 개정은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통일의 방식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극도로 분열된 국론을 화합으로 이끄는 데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통일이 일부 정치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경제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통일의 방식과 절차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남남갈등을 종식시키는 국민적 대토론을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헌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이 시대의 최고 명령이며 민주적 절차에 의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고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개헌의 공론화를 위해 많은 분들의 추천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