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0
조회 220
2013.03.20 21:38
보수화의 메커니즘이 만들어낸 기득권 양당 구조에 균열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지만 마음 한 곳에서는 불편함이 떠나질 않습니다. 오늘 김한길이 민주당이 개혁되면 안철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 까닭에 저의 갈등은 증폭됩니다.
저는 민주당의 비주류들이 우리나라 진보 진영을 몰락시킬 자들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기회주의자 외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나가는 그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정치판의 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철수와 사전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연신 마셔 되며 민주당 당권을 장악하려는 김한길의 안철수 이용해 먹기가 위선의 극치로 보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진보 진영의 제1당으로써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주당이 어떻게 바뀌어야지 합리적 보수주의자이자 개혁적 자유주의자인 안철수와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민주당의 당권 경쟁이 ‘김한길 대 반김한길’로 구도가 짜였다는 기사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이란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어찌 이 지경까지 갔는지, 영혼 없는 자들의 욕망의 정치를 보고 있자면 당장이라도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던져버리고 싶어집니다. 김한길과 안철수의 결합?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장면입니다.
하지만 차가운 얼음물에 담가둔 이성은 안철수 지지를 외치고 있지만, 김한길 같은 기회주의자들의 행태를 접할 때마다 뜨거운 용암 위를 맴도는 영혼은 김지선 후보를 지지하라고 저를 몰아칩니다. 박원순 시장을 만난 안철수의 행태가 반칙에 가까운 것이기에 이런 갈등의 골은 저 홀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제가 모순적 글을 쓰는 것도 영혼에 지을 수 없는 상처로 하나씩 쌓이고 있습니다. 안철수의 정체성이 보수와 개혁적 자유주의에 있는 것도 저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좌파 또는 중도 신자유주의자를 뜻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저의 영혼은 한 사람의 성찰로 달려가곤 합니다.
19세기의 위대한 사회주의자였던 블랑키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가 쓴 불멸의 명작인 『천체에 의한 영원』의 결론 부분이 저를 집요할 정도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벤처사업 CEO였던 경험에 기반해 ‘선한 이명박’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안철수를 비판했던 예전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블랑키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제 영혼에 말합니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각각의 세계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러한 세계와 함께 사라진다.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지구라는 투기장에서는 똑같이 좁은 무대 위에서 똑같은 드라마가 똑같은 배경에서 펼쳐질 뿐이다...그러다가 마침내 극히 깊은 모멸감 속에서 인류의 교만함이라는 짐을 짊어진 지구와 함께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우주는 무한히 반복되며, 제자리걸음을 할 뿐이다.”
정말 블랑키의 말이 옳다면 저는 지금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물론 블랑키의 주장이 고전물리학에 근거했기에 양자역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에서 보면 니체의 영겁회귀처럼 질량불변의 법칙과 만류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헤겔의 변증법을 넘어 진정한 의미의 진보를 개념화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이르지도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존재하는 매초마다 영원하다. 나는 이 순간 토로 요새의 감옥 안에서 쓰고 있는 것을 영겁에 걸쳐 써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써나갈 것이다. 책상에 앉아, 펜으로, 지금과 똑같은 옷을 입고, 지금과 동일한 상황에서 말이다”라는 블랑키의 회의적 성찰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안철수의 선택에 대한 저의 확신이 아직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새로운 것은 항상 오래된 것이며, 오래된 것은 항상 새로운 것”이며 “영원화된 현재인 것이”어서 “진보가 없는 것이”며 “단지 저속한 재현과 반복”의 연속일 뿐, “지난 세계에서 일어난 사례가 그대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라면 안철수의 새 정치도, 미국에서의 숙고도 방법론만 달라졌을 뿐 근본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면 저는 진보 진영에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기의 국면만이 희망을 향해 열려 있다”는 벤야민의 말처럼 안철수의 정치 재개가 만들어낸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기의 국면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안철수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우려처럼, 이명박의 선한 버전이고 박근혜의 합리적인 변종이라면 보수화된 기득권 양당 구조는 대한민국에서의 영원함을 구축하는 분기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부담을 안은 채 저는 안철수의 선택에서 보수화 메커니즘 균열의 동력을 찾고 있는 것이니 평생을 후회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제 뒷골을 당기는 김한길의 발언까지 고려하면 우려의 마음은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유전자는 최대화(유전자의 이기적인 성질로 자연선택에 따라 이루어지는 최적화와 반대되는 개념)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고 평균 신장도 커지고 있는 것도 특정 유전자의 최대화 경향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를테면 치사유전자처럼 인간이 빨리 죽어야 우위를 점하는 유전자들에게 인간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달갑지 않는 현상입니다.
물론 지구라는 환경에서 허용된 물리적이고 생물학적 한계를 넘을 수는 없겠지요. 유전공학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인간의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기억과 경험마저 이전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영원화된 현재의 재현’에 불과합니다. 미래 세대의 선택은 진화의 영역에서 퇴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허면 지금이라도 제가 김지선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돌아서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김지선 후보의 당선되면 진보정의당이 살아나고 진보정당들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저의 답은 ‘해변을 삼켜버릴 듯한 거대한 해일을 향해 작은 돌멩이로 맞불을 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입니다.
기득권에 짓눌린 절망의 끝에서 최후의 희망이 고개를 들었지만, 기득권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넘으려면 빅뱅 직전의 특이점처럼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에너지의 응축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구축해놓은 견고한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면 어지간한 에너지로는 흠집이나 균열조차 낼 수 없습니다.
헌데 김지선 후보의 당선에서 폭발적인 에너지의 분출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기득권 체제의 견고함입니다. 진보정의당이 21세기 현실 진보의 상징으로 떠오르기에는 이 땅의 보수화가 너무 진전된 상태이며 한 명의 의원 배출로 보수화 메커니즘을 깰 수 있다는 주장은 유아기적 발상에 불과합니다. 정치가 이상적 행위의 집합이 아니며 현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벗어나고자 지저분한 것들로 이루어진 차선이나 차악의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김지선 후보가 차기 대선주자 중 한 명인 안철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 자체로 대단한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진보 진영의 부활에도 청신호가 켜질 수 있고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희망의 서곡을 울릴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크게 봐서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와 대법원의 편향적 판결에 대한 경고, 사라진 노동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은 안철수의 때 이른 퇴장. 중도 세력의 몰락. 남아 있는 골칫거리 문재인 의원에 대한 기득권들의 퇴진 압박의 강화. 민주당 비주류에 대한 아주 최소한의 경고. 이석기와 김재연 의원의 자격심사에 대한 간접적 반대 표시.. 그리고 진보 진영에 유리한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날 수 있을까요? 기득권에게는 어떤 흠집이나 균열이 생겼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것들도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지선 후보가 승리할 경우, 노원병 보궐선거의 결과에 대한 즉각적인 물 타기와 영향 축소가 봇물 터지듯 나올 것입니다. 지역구 세습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노원병 유권자들을 향한 집단적인 이지메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민주당과 새누리당 차기 대선주자들은 안철수라는 거물을 코도 풀지 않고 제거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겠지요.
제 영혼은 그래도 김지선 후보를 지지하라고 합니다. 모호한 안철수보다 선명한 김지선이 백배는 저의 정체성과 어울린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헌데 제 이성은 진보정의당에 안철수 캠프에 모였던 인물들처럼 차기 총선에 나와 당선 가능성이 높은 유력인사들이 늘어날 수 있을 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신선한, 그래서 때 묻지 않은 정치신인들을 배출할 수 있을 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환골탈태가 진보 쪽으로, 정책적 차별성의 선명화로 이어질지 묻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이 줄어들지 묻고 있습니다. 김지선 후보가 안철수 예비후보보다 보수화된 기득권 양당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 묻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영구적 평화구축의 시발점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묻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온갖 노동 착취와 저임금의 사각지대에 갇혀 빈곤의 악순환에서 고통 받고 있는 2030세대들의 절망과 탄식, 절규가 귀에서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평생을 노동운동을 해온 김지선 후보의 당선이 안철수 후보의 당선보다 영향력이 작지 않느냐는 현실적인 물음이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영혼의 명령을 따르면 사유의 고통도 사라집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자위할 수도 있겠지요. 허면 지나간 자리에 또다시 지나갈 무엇이 들어올까요? 그것이 희망이란 이름에 적합할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저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현재의 저로서는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라는 찌꺼기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꾸 어린 조카들이 눈에 밟히고 미래 세대의 아우성이 제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수없이 단련된 차가운 이성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기 일쑤인 영혼을 잠재우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말처럼 “감정이 극한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은 숨이 탁 막혀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정신이 고양될 때마다 영혼이 비정상적으로 우위를 점령하고 육체는 지금까지의 온건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미욱한 저라면 상실의 크기가 더하겠지요.
“언제나 진실보다 약간 더 높은 목표를 좇으려고 애를 쓰다가 자신을 소모해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떨칠 수 없는 것이 저의 한계인 모양입니다. 아울러 지금 내가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가지 목표물을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본 결과 내 눈이 흐려진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근시안적인 군중들이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온 희망에 다 함께 올라타다 보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상에게조차 신성(神性)을 씌우게 되고 누군가 침묵 속에서 기도할 때마다, 그것의 존재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너무 많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지금 동굴이나 광장의 우상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저에게 “돌아갈 길은 없”고 “전진을 계속하여 죄와 인생에 보다 깊이 빠져 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안철수와 김지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저는 지금 영혼과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김한길의 발언 때문에 그 흔들림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민주당 비주류들에게 진보 진영의 투쟁의 역사와 미래의 어젠다를 넘겨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프루스트와 비슷한 심리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담금질로 상당히 단단해진 이성적 판단이 저의 정체성의 속살인 영혼의 선택을 따르라고 유혹하는 것 때문에. 민주당이 개혁해야 안철수와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한 김한길의 정신 나간 발언 때문에.
“바다는 언제나 자기 집에 앉아 생을 혐오하는 이들을 유혹할 것이고, 수수께끼에 대한 끌림은 최초의 슬픔을 넘어선다. 마치 그러한 슬픔을 현실이 충족시킬 수 없으리라는 예감처럼 말이다.”
안철수는 안철수의 길을! 민주당은 민주당의 길을!
김한길의 기회주의적 발언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