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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20:28
경향신문 3월18일자 손호철의 정치시평인 ‘안철수는 유시민의 길을 가려는가?’는 유시민과 안철수의 정체성과 정치 역정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탁월한 관점을 보여줍니다. 개혁적 자유주의자로서 노무현과의 비교도 노원병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인 손호철은 ‘유시민의 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3김 정치에 의해 사당정치와 지역주의로 왜곡된 한국의 자유주의를 아래로부터 당원이 움직이는, 제대로 된 근대적 정당과 탈지역주의”를 바로잡으려는 실험이었다고 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손호철 교수는 이어서 ‘유시민의 실험’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진정성보다는 단순히 재주에 의존하고, 긴 호흡을 가지고 옳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감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했던 ‘소탐대실의 정치’에 기인”했다고 합니다. 손 교수는 유시민이 노무현처럼 긴 호흡으로 가지 않은 것이 실패의 핵심이라고 봤습니다.
그는 또한 유시민의 정계 은퇴를 촉진시킨 것이 자신과 같은 개혁적 자유주의자로 “진성당원에 의한 인터넷 정당과 탈지역주의”를 핵심 개혁 내용으로 삼고 있는 안 전 교수의 등장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유시민이 현실정치에서 안 전 교수 이상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정치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은퇴를 앞당겼다는 뜻입니다.
손호철 교수는 안 전 교수에 대해서도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를 통해 더 큰 것을 얻는 ‘노무현의 길’과 ‘소실대탐의 정치’가 아니라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해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유시민의 길’과 ‘소탐대실의 정치’로 나아가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손 교수의 주장은 국민의 전반적 정서와 상통하는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시평의 마지막은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의 민주통합당은 희망이 없다. 따라서 그 형태가 어찌 되었건, 안 전 교수를 중심으로 한 야권의 개편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 전 교수가 노무현의 길이 아니라 유시민의 길을 가는 한 그 한계는 뻔하다”며 안 전 교수에게 멀리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손 교수이 주장이 안 전 교수의 행보에 대한 표상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유시민의 패배에 대한 분석에도 현장에서 조직을 대표하는 정치인에 대한 판단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안 전 교수가 노무현의 길을 선택하라고 한 것도 일면의 진실만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손 교수 입장에서 짧은 정치시평에 자세한 분석들을 싣는 것이 불가능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안 전 교수를 비판하며 유시민의 길을 예로 든 것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유시민은 현실정치인으로 참여당이라는 인터넷 정당의 대표였고 나중에는 통합진보당과 합당을 했습니다. 비록 최후의 패착이 되었다 해도 그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유시민은 당원을 책임져야 하는 정당의 대표였기 때문에 뭔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노무현의 정치적 동반자도 아니었고 진성 친노도 아니어서 유시민은 유시민 나름의 정치 여정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현실정치에 들어온 이상,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 이상, 진성당원 중심의 근대정당으로 지역주의를 타파하고자 한 이상 현실적인 결과물을 가장 빠르게 내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양당 체제를 깨지 않는 한 한국 정치는 희망이 없다고 본 유시민이 통합진보당과의 합당까지 감행한 것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습니다. 안 전 교수와의 이념적 교집합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안 전 교수 때문에 정계 은퇴를 서둘렀다는 것에는 논리적 비약이 보입니다. 유시민이 그만큼 용기 없는 사람도 아니고 생각이 형편없지도 않고요.
그는 현실정치인으로서 자신이 해볼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소진했기 때문에 정계에서 물러난 것이고, 당원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 더 이상 당원들을 이끌어나갈 정치적 동력을 찾을 수 없었기에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원을 거느린 조직의 수장이라는 것은 소탐대실이 분명해도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적 결과물이 없는 상태에서 유시민이 당원을 계속해서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게다가 한국정치에서는 정당 득표율이 2% 미만이면 자동적으로 법적 효력을 상실합니다. 보수적 정당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법률이죠. 유시민이 통합진보당과의 합당도 그래서 진행한 것이고 비례대표 부정선거의 검찰 수사가 참여계 인사의 구속으로 마무리된 것에 대한 정치적 책임도 져야 했습니다.
안철수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지단 대선의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중도사퇴를 했기 때문에 그를 믿고 캠프에 합류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안철수 현상’에 취해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현실정치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이 조직과 전략의 부재로 이어져 굴욕적인 중도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캠프에 모인 자들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습니다.
폴리페서라는 자들의 특징이 책임지지 않고 잔뜩 부추기는 데는 일등선수들이니까요. 일반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자들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것처럼 그들은 정치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살아갑니다. 이런 경향은 인문학과 사회학만이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수사회라는 것이 지독히도 폐쇄적이라 별 볼일 없는 전문지식을 무기로 무식한 정치인들을 흔드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아무튼 무책임한 중도사퇴로 인해 안 전 교수는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무한대의 빚을 지게 됐습니다. 자신의 치기 어린ㅡ현질정치의 높은 벽과 온갖 협잡에 대한 절망에서 나온ㅡ포기선언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죽어도 하기 싫었던 문재인 후보 대선유세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소극적이고 모호한 정치 언어로 일관한 지원 유세에 대해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투표 전날까지 최선을 다한 것도 그가 할 수 있는 전부(그릇의 크기일 수도 있지만)였습니다.
안철수의 길과 노무현의 길이 다른 것은 이것 외에도 또 있습니다. 노무현은 민주당이란 우산 아래에서, 송아지 삼총사로서, 청문회 스타로서, 지역정치 타파가 가장 중요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활동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해왔던 것에서 안철수 전 교수와 다릅니다. 노무현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를 내릴 수 있었지만 안 전 교수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비록 그것이 자초한 것이라고 해도.
또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이룩해낸 당시의 넥타이 부대들은 민주화라는 열망의 동반자였고 직선제 개헌을 군부 권위주의 정권에게서 받아냈지만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한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노무현이 현실정치인으로서는 바보나 하는 고난의 길을 자처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던 시대의 최대 수혜자이자 위대한 리더였습니다.
반면에 안철수는 그놈의 ‘무릎팍 도사’에 출현하면서 ‘청년 멘토’에서 ‘국민 멘토’로 급부상한 벼락 스타였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인사가 돼있었다’는 명언처럼 반이명박 정서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정치 불신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하루아침에 벼락 스타가 된, 그러나 정치 경험이 전무한 교수에 성공한 전직 CEO에 불과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안철수의 등장으로 한반도 상공을 유령처럼 떠다니던 반이명박 정서가 마침내 정착할 곳을 찾았고 그것이 ‘안철수 현상’으로 과대포장 되기에 이릅니다. 안 전 교수는 이런 외부로부터의 호출에 ‘어어 하는 중’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노무현의 길이나 유시민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그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비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넥타이 부대의 자리가 촛불시민들로 대체됐다고 하나 정치적 구심점이란 면에서 넥타이 부대는 단일했지만 촛불시민들은 다양했습니다. 노무현은 넥타이 부대가 견인했던 민주화의 완성이라는 거대한 호수에 뛰어들어 대통령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면, 안철수는 촛불시민들이 채운 반이명박 정서라는 거대한 호수에 스며들어 대통령 후보까지 나서야 했습니다.
노무현은 넥타이 부대와 함께 거대한 호수에 뛰어들어 수위를 높였지만 촛불시민들은 거대한 호수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안철수의 합류로 인해 수위가 높아질 것이 없었습니다. 노무현이 파문을 따라 호수의 끝까지 갔다면 안철수는 곧바로 가라앉아 수장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 상황과 주어진 역할, 담론의 구조와 성격이 다르기에 둘의 길이 같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노무현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은 문재인 의원이지 안철수 전 교수가 아닙니다. 또한 안 전 교수를 유시민과 비교하는 것도 상당히 작위적입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대의를 따르면서도 감동과 울림이 있는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현실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비판적 정서가 강한 그들에게 구원의 사도라고 여겼던 안철수 전 교수의 행태가 아쉽게 다가오고 따라서 실망감이 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대선 패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분노와 적의가 안철수에 대한 배신감의 형태로 변질되면서 집단적 이지메가 일어날 정도입니다. 안철수 입장에서는 정치 세력화가 늦으면 늦을수록 불리하고, 반안철수 정서가 굳어지기 전에 현실정치로 귀환해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텐데, 그의 선택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의외로 거세지자 상당히 당황해하는 것 같습니다.
예상외의 상황에 직면한 안철수 전 교수가 역효과를 불러오기 십상인 박원순 시장과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안철수 전 교수의 현실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시민이나 노무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손호철 교수의 지적처럼 안 전 교수가 소탐대실의 정치를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기득권 양당과 언론들이 얼씨구나 하면서 득달같이 달려들 여지(박원순 시장을 만난 것! 안철수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참모의 감언이설이었을까? 참으로 어리석다)를 만들어 주어서도 안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안 전 교수는 자신만의 길을 분명하게 걸어가면 됩니다. 그것이 유시민은 물론 노무현의 길과도 달라야 함은 역사의 진보를 믿는 필자의 개인적인 신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안 전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과는 아직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아직 정당을 만들지도 못했고 국회의원도 아니며 차기 대선주자로 선정된 것도 아닙니다. 그는 진화 중인 정치신인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미숙함을 드러내는 열정 어린 초보자입니다. 그렇다고 계산이 없으면 안 되기에 나름대로의 수순에 따라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은 갈지 자라 곳곳에서 작은 실족들을 하고 있지만(허나 쌓이고 축적되면 되돌릴 수 없다).
노무현처럼 서민적 감성과 불세출의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정치인입니다. 그런 이중적 파괴력을 가진 정치인이 다시 나올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그런 노무현 특유의 양면적이고 반권위주의적 특성 때문에 재임 기간 내내 기득권의 흔들기와 발목잡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정부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 언론뿐만 아니라 이 땅의 기득권 전체와 맞장 뜬 유일한 정치인이 노무현이기 때문에 안 전 교수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재인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과는 다른 신뢰의 리더십을 구축한 것도 어쩌면 노무현의 운명과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만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동일한 형태의 리더십으로는 절대 노무현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문재인 의원은 자신만의 리더십을 구축했던 것이고 신뢰의 리더십은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의 리더십은 탐욕스런 기득권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지만, 5년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본 문재인의 리더십은 충돌을 최소화하면서도 파괴력 면에서는 결코 노무현 리더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둘의 리더십은 상보의 관계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문재인 의원은 더 이상 노무현의 2인자가 아니라 홀로서기에 나선 정치신인이자 국정 경험을 통해 기득권이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 최고의 행정가입니다. 그래서 기득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스나이퍼인데 꼬리를 잡힐 만한 증거를 남기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처럼 벼랑 끝까지 몰고 갈 방법이 없는 상태입니다. 새누리당의 2중대에 불과한 민주당 비주류를 종편들과 KBS와 MBC 같은 기득권 매체들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중도에서부터 합리적 보수주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안 전 교수는 범야권에 속하지만 총선과 대선이 다가오면 현재의 기득권 양당 구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입니다. 그를 키워서 보수화된 양당 구조를 다양한 이념으로 무장하고 특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다당제로 갈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원성의 이름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보수 신문과 종편들을 필두로 한 보수화 메커니즘이 이에 대해 모를 리가 없습니다. 문재인 의원은 민주당 비주류를 통해 충분히 억누르고 있는 상태이니 지금은 번외의 변수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안철수 전 교수가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독자 신당 창당까지 이어지고 그것이 보수화 메커니즘에 균열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아지자 적극적인 압박에 들어갔습니다.
기득권들이란 일부 회원이 바뀐다고 해도 시스템이 유지되면 why not입니다. 어차피 상위 1% 수준에서 돌아가는 이너서클에 충격이 가해질 정도의 회원 변화만 아니면 됩니다. 지식 검색을 통해, 고전 읽기를 통해, 푸코에서 딜뢰즈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마르크스와 벤야민, 폴라니와 포퍼를 통해, 기든스와 율리히 백, 스티글리츠와 센을 통해 자본주의와 함께 들어오지 못한 부르지아지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각종 성찰들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기반한 기득권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의 깊이가 늘어나도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철수 전 교수에게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우리는 기다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비난과 저주에 동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안철수 전 교수에게 멀리 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유권자들도 멀리 볼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정치적 선택도 가능한 민주공화국이고요.
잠깐 쉬어가는 글 다음에 안철수 전 교수와 김지선 후보 사이에서 안 전 교수를 선택한 저의 갈등에 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어설픈 철학자고 편협한 인격자며 모자란 운동가이자 텍스트 해석가이기 때문에 내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노무현을 가장 존경하고 문재인과 진보좌파의 부활을 위해 안철수의 성공을 선택했습니다. 저는 2년 후의 총선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