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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5 13:36
날씨가 좋다. 다행이다. 아들이 태어나고 처음 하는 여행이다. 집사람과 둘만 다니던 여행은 가족여행 이라 하기 민망하니, 첫 가족여행 이라고 해야겠다. 따듯하고 맑은 봄날이다.
그냥 포근한 기분이 드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가운데 좁은 도로를 두고, 왼편엔 야트막한 산이 보이고 오른편은 논이다. 마을 입구부터 관광버스들이 주차하느라 북적이고 있지 않다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마을이다. 주차장은 꽉 찼다. 주차장을 지나 오른편 논길로 들어가니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논길 한 편에 차를 댔다.
논이 넓지는 않다. 그런데 아주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 밝은 초록빛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농촌에 온 것을 실감나게 한다. 도착하기 30분쯤 전부터 꼬맹이는 잠이 들어있다. 유모차에 태우고, 오랜만에 집사람과 손을 잡고 걸었다. 논길은 조용하다. 마을 입구 저편 산등성이를 돈 바람이 멋지게 논을 타고 달려 오는 모습이 보인다. 와서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어깨를 툭 치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고는 반대편으로 도망간다.
점심때가 지났다. 꼬맹이가 깨면 정상적으로 밥을 먹는다는 것은 단념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마을 복판에 막국수 집이 보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다. 물 막국수와 비빔 막국수를 하나씩 시켰다. 사람들이 많은데도 생각보다 빨리 나온다.
“으음, 맛있다”.
(집사람은 ‘피식’ 하고 웃는다.)
우리 아버지는 막국수 마니아다. 밖에서 돈 주고 사먹을 음식은 막국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신다. 당연히 나도 막국수만큼은 맛을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집사람의 저 웃음은 “자기 입에 맛없는 게 있어?” 이런 뜻을 내포 하고 있는데, 아니다. 이곳 막국수, 맛있다.
막국수를 먹고 마을 뒤편으로 돌아가니, 조그만 언덕이 보인다. 언덕 너머엔 저수지가 있다. 평온하다. 딱 우리 꼬맹이만 한 여자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간다. 안아 달라고 할 법도 한데, 앙증맞은 다리로 잘도 걷는다.
언덕 위에는 벚꽃 나무가 있고, 할머니 세분이 앉아 계신다. 관광차 오신 듯 하다. 색을 맞추셨는지 빨강, 노랑, 남색 점퍼를 입고 계신다. 후후, 텔레토비 동산 같다. 세분이 도란도란 이야기 하는 모습이 정겹다.
저수지 양쪽과 건너편은 모두 산이다. 왼 편엔 허름한 집이 하나 보이고, 오른 편엔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지나는 사람은 없다. 산에 둘러 쌓여 있어서 인지, 물결이 유난히 잔잔하다. 한참을 언덕에 앉아서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꼬맹이가 깨어났다. 국화꽃 세 송이를 사서, 헌화대에 올려 놓고 돌아섰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한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바람개비를 만들어 주고 있다. 수수깡 막대기에 안전 핀으로 고정시킨 노란색 바람개비다. 우리 꼬맹이도 바람개비 하나를 받아서 손에 꼬옥 쥔다. 무척 좋아한다. 바람개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기라도 할 듯 의기양양하다.
이번엔, 산에 올라가 보려고 아이를 등에 업었다. 요즘 워낙 체력이 바닥이라 걱정을 했었는데, 지도를 보니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오는데 1Km 남짓 밖에 안 된다. 땀이 좀 나고 숨이 가빠오려 하니 정상이다. 마을은 북적거려도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올라오는 오솔길이 한적한 것이 마음이 차분해 진다. 숲 냄새가 좋다.
내려오는 길에 ‘정토원’에 들렀다. 유명한 산사들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 독특한 운치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마을처럼 그냥 평범하고 작은 절이다. 눈에 띄는 것이라곤 깃털이 요란한 닭 두 마리가 전부다. 꼬맹이가 보더니 졸졸 쫓아 다닌다. 바람개비는 여전히 꼬옥 쥐고 있다.
꼬맹이가 갑자기 어딘가로 들어가자고 한다. 기념품을 파는 곳인가 보다. 들어가니 국화차를 주신다. 사방에 액자가 걸려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눈길을 끈다. 흰 화선지에 빨간색 하트가 그려져 있고 그 하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사람은 사랑을 만들고, 사랑은 사람을 만든다”
좋은 말이다. 사랑보다 우선되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된다. 고개가 끄덕여 진다.
산을 내려와 마을을 한 바퀴 도는데, 살짝 노을이 진다. 여전히 사람들이 있지만, 그리 북적이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도 가야 할 때가 된 듯 하다. 다시 묘소로 향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꼬맹이가 돌멩이에 걸렸는지 폴짝 하고 넘어진다. 가서 손을 털어 주었다. 바람개비를 내가 갖고 있으니, 두 손을 모으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람개비를 달라고 한다. 바람개비와 아이 얼굴을 한 화면에 넣고 사진을 찍었다. 찰칵.
아까 아빠와 함께 걸어가던 여자아이가 지나간다. 이번엔 유모차를 타고 있다. 녀석도 한 손에 바람개비를 쥐고 있다. 문득 이 꼬맹이들이 크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지금보다 살만할까?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다. 텔레토비 할머니들 보다 내가 훨씬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이놈들은 지금보다 낳은 세상에서 살게 될 거라 믿는다. 이놈들이 그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한 몫 해줬으면 좋겠다. 부디, 손에 들고 있는 그 노란 바람개비 지금처럼 꼬옥 쥐고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다.
출처/ http://book.interpark.com/blog/postArticleView.rdo?blogNo=2100100795&categoryType=1301&listSize=10&listType=L&postNo=2721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