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전 교수가 삼성 X파일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의 지역구인 노원병 보궐선거에 나가는 것으로 정치 재개에 나선 점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안철수의 선택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왈가불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얘기 중에서 안철수 전 교수를 고 노무현 대통령에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노회찬 전 의원도 안 전 교수가 노무현의 길을 가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했지만, 저는 몇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지역구 세습의 문제는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라 이번 글에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첫 번째, 안철수는 노무현과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살아온 과정도 그렇고 성공한 분야도 다르며 직면한 시대와 역할도 다릅니다. 안철수가 노무현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라면 새누리당에 대한 범야권이라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안철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이지 노무현처럼 진보주의자는 아닙니다. 기득권 출신과 비기득권 출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두 번째, 안철수가 국민들이 불러낸 대선 후보였다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지역주의 타파로부터 시작된 바보 정치인의 뚝심이 일으킨 ‘노풍’과 기성정치에 대한 막연하고도 일반적인 염증이 과대포장돼 ‘새정치(실제로는 반정치, 특히 반정당정치)’로 둔갑된 ‘안철수 현상’은 인물과 현상이 전도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무명 정치인으로써 지역선거에서 연속적인 패배를 당한 당사자를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린 ‘노풍’은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 일으킨 바람이 국민적 열망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아래로부터의 정치 혁명이었습니다. 견고한 엘리트들의 기득권 정치를 극복하려면 인물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현상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노풍’의 정치적 의미입니다.
온갖 시련에 고집과 실패의, 그래서 바보의 아이콘이 되었을지라도 한 명의 인물이 단련돼서 거대한 그릇으로 커졌을 때 국민은 비로소 감동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정치 리더십 탄생의 전형적인 사례가 ‘노풍’의 실체입니다. 인물이 현상을 담아낼 수 있을 때만이 성공한 리더로써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정치의 긍정적 리더십입니다.
이에 비해 ‘안철수 현상’은 정반대의 과정을 거친 실패한 정치적 리더십입니다.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에서 태동해 새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한 것이 ‘안철수 현상’의 본질인데 현실정치 경험이나 조직과 정책 등에서 턱없이 준비가 부족했던 안철수가 현상을 품어내기에는 경험과 그릇의 크기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현실정치는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 하는 것이지 꿈-의식 속에서의 상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꿈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에 매몰되면 모든 것이 안개 속으로 빠져듭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상황에서 길을 잃는 것은 당연한데 이때 필요한 것이 단련된 경험에서 나온 직관적 판단의 강력함입니다.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은 여우의 지혜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안철수를 노무현과 비교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이래서 분명합니다.
세 번째, 노무현의 길은 안철수가 아닌 문재인 의원이 가야할 길입니다. 문재인 의원의 최대 강점인 신뢰의 리더십이란 반기득권 정서에 힘입은 ‘노풍’의 성공과 좌절을 온전히 담아낸 결과이기 때문에 구축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득권의 삶을 살아온 안철수가 소화해낼 수 있는 그런 리더십이 아닙니다. ‘노풍’은 문재인 의원이나, 아직 일부만 검증된 안희정 지사 등에 의해 이어져야 할 것이지 안철수가 모방하거나 차용해야 할 길은 아닙니다.
네 번째, 노무현과 안철수를 비교하기에는 정치적 아웃사이더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노무현은 깨어서 세상의 혼돈과 모순을 본, 특별히 어둠 쪽에서 빛의 탐욕을 본 전복과 실천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반면에 안철수는 세상의 혼돈과 모순을 본 것은 같지만 빛의 영역에서 어둠의 슬픔을 바라본 관념과 이상의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즉, 정치적 아웃사이더에도 보수적 가치의 인물도 있고 진보적 가치의 인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로 해서 노무현이 시대 전체를 문제로 봤다면 안철수는 시대 전체가 아닌 정치와 일부 자본의 문제만을 봤습니다. 보수의 세상에서 노무현이 새시대를 위해 혁명적 전복을 꿈꾸었다면 안철수는 시대를 인정하되 새정치를 위한 보정의 손질을 꿈꾸었습니다. 애당초 목표했던 것의 크기도 시대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총합도 너무나 큰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제가 안철수 전 교수의 노원병 보선 출마를 찬성한 이유는 미래의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현실정치에 정식으로 입문하는 지역구 의원으로써 입니다. 지금의 안철수란 오직 그 정도의 그릇이고 크기이기 때문이며, 이번 선택에 그 이상의 것들을 갖다 붙이는 것은 그를 또다시 과대포장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합리적 보수의 아이콘으로서가 그의 삶이 말해주는 정체성에도 맞습니다.
지금의 안철수는 ‘앞선 세대가 넘겨준 문제들로 해서 신음하고 있는’ 이 땅의 청춘들을 대표하는 인물 중에 맨 앞에 있는 정치인입니다. 안철수의 선택은 그래서 적절합니다. 그가 현역 의원으로 기성정치판에 입성하면 이 땅의 2030세대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줄 힘 있는 정치인을 확보하게 됩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안철수의 선택에 동의하는 것이고요.
아울러 상대편의 실정에 힘입어 정치 생명을 늘려갈 뿐, 정당으로서의 수권능력 창출에 너무나도 무력한 모습만 보여주는 민주당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기에 안철수의 선택에 찬성합니다. 진보정의당으로서도 한 석의 국회의원보다 안철수라는 거물과의 싸움을 통해 선명 야당(무너져 내린 진보의 최전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안철수를 노무현과 비교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는 절대로 노무현의 길을 따라갈 사람도 아니지만 노무현의 폭발적인 정치력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릇도 못됩니다. 안철수가 2030세대를 넘어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라나는 것은 그의 능력에 달려 있겠지만 그 방법적 행태가 노무현과는 절대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안철수가 차기 대통령에 오르더라도 분명하게 다른 것입니다.
지금의 안철수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보이는 얘기들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직 안철수는 제대로 된 검증조차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노무현에 이르려면 안철수는 죽어라고 노력해야 합니다.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 이 땅의 청춘들로부터 출발해서 세대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금은 안철수의 선택을 2030세대의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새누리당으로 가는 표를 잠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인이 안철수이라는 사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