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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4 08:48
국정원녀 사건 두달, 경찰 뭘했나 보니
대선을 일주일 남기고 터진 국정원 여직원 불법 선거 개입 의혹은 엄청난 폭발력이 잠재돼 있는 사건이었다. 야당 후보에게는 불리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인터넷 공간에서 여론을 조작한 배후에 국정원이 있다는 게 사실로 밝혀질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정원 의혹, 엄청난 ‘폭발력’에 찬물 끼얹은 경찰
‘폭발력’에 찬물을 끼얹은 건 경찰이었다. 김씨로부터 컴퓨터 2대를 제출받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수사 착수 불과 3일째인 16일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속하게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다. 그것도 밤 11시에 말이다. 경찰은 “후보자에 대한 지지ㆍ비방 댓글을 올린 사실이 김씨 컴퓨터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의 이례적인 발표를 적극 인용한 건 박근혜 후보였다. 궁지에 몰린 박 후보에게 빠져나갈 ‘탈출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역공의 빌미까지 만들어 주었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은 오피스텔 대치 상황과 관련해 ‘성폭행’ ‘인권침해’라는 민감한 용어까지 끌어들여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에게 역공을 퍼부었다. 보수편향의 언론들의 총력지원을 받은 이 역공전략은 박 후보에게 불리한 판세를 뒤집는 효과를 안겨줬다.
적에게 포위당한 군대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오는 데 그치지 않고, 외곽 지원군의 도움으로 역공을 감행해 패배 국면에서 승기를 잡은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경찰의 중간발표는 이토록 역동적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국정원의 '김 일병' 구하기?
‘탈출구’ 만들어줬던 그 수법 그대로
그 후 두 달, 경찰은 무엇을 했을까? ‘탈출구’를 만들어줬던 그 수법 그대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수사를 해왔을 거라는 추측 그대로였다. 김씨 하드디스크에서 4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발견해 놓고도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구글링’ 검색 등 아이디 추적작업을 며칠만 제대로 했어도 김씨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거반 밝혀낼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김씨와 공모한 민간인 이씨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건 지난해 12월 말. 경찰이 두 차례나 이씨가 기거하는 고시원을 찾았고, 올해 1월 4일 김씨도 경찰조사에서 공모자 이씨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씨는 김씨가 제공한 아이디가 포함된 다수의 아이디로 야당을 비방하고 여권을 옹호하는 160건의 글과 2000여건의 찬반표시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이씨의 ‘왕성한 활동’ 중 일부에 불과하다.
김씨와 짜고 한 일일까. 아니면 국정원이 개입해 이씨를 빼돌린 걸까. 김씨가 경찰에서 이씨의 존재를 인정한 다음날인 1월 5일 이씨는 거주하던 고시원의 방을 빼고 잠적한다. 고시원 운영자의 말로는 방세가 미리 지불된 상태인데도 이씨가 한사코 짐을 쌌다고 한다.
민간인 공모자 잠적...곳곳에서 감지되는 수사축소 의혹
민간인 이씨의 존재는 국정원에게 크게 불리한 ‘증거’다. 김씨의 행각에 대해 “인터넷 상의 대북심리전에 대응하기 위한 고유 업무”라고 강변해온 국정원의 주장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의 열쇄를 쥐고 있는 용의자가 참고인 출석조차 거부하고 잠적까지 했는데도 ‘국가공무원법이나 국가정보원법을 적용할 수 없는 일반인’이라는 이유로 수사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수사 축소 의혹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김씨가 주로 활동한 누리집 ‘오늘의 유머’ 운영자 이호철씨는 지난해 말부터 참고인으로 10여 차례 경찰에 출석해 수사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김씨의 ‘오유’ 아이디 16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30여개의 아이디를 찾아내 수사를 부탁했다. 하지만 경찰은 통신회사 압수수색 등의 문제를 들어 관련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묵살해 버렸다.
‘뒷짐 경찰’이 부산해진 건 지난달 31일 보도된 <한겨레>의 기사 때문이다. <한겨레>는 김씨 ID 가운데 11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라며 '김씨가 대선을 앞두고 당시 야당 후보를 비판하는 글을 포함해 91건의 정치편향적인 글을 올렸다'고 주장했다. 야당 후보 비판 등 대선과 관련된 활동을 한 적이 없다던 경찰과 국정원의 주장을 무너뜨리는 보도였다.
<한겨레>등 언론보도로 상황 급물살...부산해진 경찰
경찰도 김씨가 ‘오유’ 게시판에 대선과 관련된 글 49건과 또 다른 사이트에도 4대강, 해군기지 등 정치와 관련된 글을 29회 올린 사실이 있다고 인정한다. 이어 다음아고라와 네이버 등에서도 김씨와 유사한 글이 발견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 때부터 상황은 급물살을 탄다.
2월 4일 서울경찰청장은 사건을 담당해온 수서서 권은희 과장을 송파서로 전보하는 인사명령을 낸다. ‘과장급 경정의 경우 통상 근무기간 1년이면 교체하는 것이 인사방침’이라는 게 경찰이 밝힌 전보의 이유.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종로서, 남대문서, 영등포서 등에서 1년 넘은 경정급 7명이 서장의 특별요청으로 그대로 잔류했다’며 이광석 수서서장이 권 과장에 대한 잔류요청을 하지 않은 것을 꼬집었다.
▲기사출처: <노컷뉴스>
권 과장은 2005년 여성 사법고시 최초로 경찰에 특채된 ‘변호사 출신 경찰’이다. 그는 이번 사건을 수사하며 수사발표 시기와 발표내용을 놓고 경찰 수뇌부와 잦은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신과 원칙을 주장하는 그에게 부담을 느낀 ‘윗선’이 ‘내부 인사방침’을 빌미삼아 경질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건 담당경찰 부담되자 경질? 증거는 ‘조갑제 닷컴’
쌍수를 들어 권 과장의 경질을 환영한 보수편향의 <조갑제 닷컴>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조갑제 닷컴>은 ‘경축! 제멋대로 방첩기관 파헤치던 수사과장 교체’라는 글을 통해 “윗선과 마찰까지 빚어가며 무리하게 방첩기관의 업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던 권은희 수사과장의 교체는 환영할 일이다”며 “경찰은 더 나아가 즉시 수사를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일 김씨는 개인정보보호법 위반혐의로 한겨레 기자와 사이트 운영자를 검찰에 고소했다. 민주당은 6일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을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를 축소ㆍ왜곡하고 직권을 남용한 혐의와, 중간수사결과를 수서경찰서 홈페이지에 게재한 혐의(경찰공무원법 위반) 등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마침내 경찰도 움직임을 보였다. 언론에 의해 이씨의 존재가 알려지고 김씨의 행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등 상황이 급물살을 타는데다 여론도 악화되는 게 부담스러웠나보다. 8일 수서서는 김씨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또 이씨의 신분을 피의자로 바꿔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 인물에 해당하는 이씨에 대한 출국금지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축소수사 최대 수혜자 박근혜, 사과라도 해야 도리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종북 프레임’으로 몰아갈 요량이다. “‘오유’ 등의 사이트에서 종북활동을 하는 사람을 적발하기 위한 업무 수행의 일환”이라는 게 국정원의 주장이다. 변명이 군색하다. 종북활동을 적발하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올라오는 글을 감시하면 그만이다. 아이디를 만들어 직접 글을 올리고 찬반표시를 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일 텐데 왜 꼬리가 잡힐 짓을 사서 한 걸까.
사건 발생 두달. 수사를 제대로 확대했더라면 더 많은 공모자와 증거들이 확보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증거를 인멸하고, ID를 없애고, 공모자들이 잠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축소수사의 최대 수혜자인 박 당선인도 입을 열어야 한다. 경찰의 황당한 중간발표를 뒷배삼아 ‘성폭행’ ‘인권침해’로 몰아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