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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과 젊은 작가 고발하는 선관위

댓글 1 추천 4 리트윗 0 조회 42 2013.01.14 22:03

나는 믿는다......내 영혼을. 소중한 물건처럼.

 

                                                                             - 레옹 되벨의 《작품집》 중에서

 

 

 

 

 

“왜 주는......자연의 노래와 인류의 절규를 숙명적인 찬미가 속에 영원히 혼합해놓았을까?”(빅토르 위고 「산정에서 들리는 것」 중에서,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파리》에서 재인용)만큼 빅토르 위고를 잘 설명하는 문장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위의 인용문처럼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폐허를 가장 문학적인 언어로 노래한 위대한 작가입니다.   

 

 

요즘 상상을 불허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이 부르주아가 세상을 점령해가던 19세기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대로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자본주의의 희생양인 대중에게서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탁월한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정치가입니다. 아마도 보들레르, 발자크와 함께 프랑스가 나은 가장 위대한 문학가라 할 수 있습니다.

 

 

위고의 대표작인 《레 미제라블》은 작가 스스로 말했듯이 19세기 극도로 혼란한 역사의 현장에서 “한 저주받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성인이 되고, 어떻게 예수가 되고, 어떻게 하느님이 되는”지 그려 낸 소설입니다. 헌데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과 함께 이 두 책에 도전하려면 상당한 용기와 엄청난 끈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밝혀둡니다.

 

 

장담하건대 영화를 보고 이 두 개의 작품을 통독하시는 분은 몇 십 명도 안 될 것입니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신 세대들에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장대한 분량이고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도 어려서 읽은 까닭에 끝까지 갈 수 있었지 지금 다시 도전하라면 아마 못할 정도이니 과연 영화에 감명 받은 몇 분이 두 소설을 독파해낼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보들레르가 시집 《악의 꽃》을 통해 자본주의의 수도로 거듭나던 19세기의 수도인 파리를 암울한 상징과 악마적 표현으로 그려냈습니다. 반면에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통해 국가와 결탁한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무한 증식과 노동 착취가 불러온 필연적인 산물인 19세기 혁명의 시대를 그려냈습니다. 보들레르가 유사 귀족의 시각으로 19세기의 파리를 노래했다면 위고는 대중의 시각으로 풀어냈습니다.  

 

 

이중에서《악의 꽃》은 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거나 신앙이 깊은 분들은 피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보들레르는 인류 역사상 괴테나 릴케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시인이지만 《신곡》을 쓴 단테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신의 입장에서 선과 악을 다루었다면 보들레르는 악마의 입장(이것이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현대인의 내면이다!)에서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구시대의 작가들이 구원의 여인상을 창녀로부터 찾는 경향이 있었던 것처럼, 자발적 성매매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강제한 법률이 위헌 제청된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악의 꽃》은 도전해볼 만한 위대한 시집임을 밝혀둡니다. 단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에 해설서와 함께 보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단테와 보들레르는 양 극단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니 인류의 위대한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원하시는 분은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책들입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입장에서 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까지 더하면 가히 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도 권해봅니다.

 

 

프랑스 혁명을 조금 더 알고 싶은 분들은 토크빌의 《앙시앙 레짐》과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을 더하면 거의 전문가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프랑스 대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마르크스와 벤야민과 폴라니 등이 왜 부르주아의 탐욕(자유 시장과 자본주의의 결합)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소설가 중에서는 한 명도 사회주의자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문학적 언어로 현실과 상상, 사유의 결과물들을 풀어낼 뿐 정치적 의도라는 것이 없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위고든, 《악의 꽃》에 보들레르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든, 그들은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MB정권의 파렴치한 행태들을 참을 수 없었던 젊은 문인들이 정권교체를 희망한다는 광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문학적 언어로 현실과 상상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가난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문학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승자독식의 피해까지 받고 있는 이들은 한 달에 몇 십 만원도 벌지 못합니다.

 

 

그들은 글을 쓸 때만이 자유롭고 비로소 살 수 있는 자들이자, 거의 대부분 신자유주의가 배출해낸 극빈자들입니다. 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고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현실을, 그 현실 속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펜이 무력해진 세상에서 아직도 펜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선관위가 그들 중 몇 명을 고소했습니다. 정권교체가 들어간 선언문을 광고했다고 선거법 위반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대한민국 선관위입니다. 한류를 그렇게 떠들어대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과연 선관위의 고발이 그들의 자발적 판단에서 이루어졌을까요? 설사 그렇다 쳐도 힘없는 문인들의 절규를 이제는 법으로 처리하겠다고요?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예술은 시작한다고 합니다.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법이 지독히도 편향적인 규범조직으로 정착했고, 제도권 언론마저 권력의 시녀를 자처하는 마당에 21세 대한민국 대중들의 현실을 어느 누가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작가들마저 그 예술적 자질이 과대포장된 김지하처럼 변절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난 대선 패배로 맨붕 상태에 빠진 분들에게 힐링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레미제라블》을 보신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현 정권과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직시해서 정권교체의 희망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문인들을 선관위가 고발하는 나라에서 《레미제라블》 같은 소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해 마음껏 떠들고 지껄이며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들이 무력해진 펜이지만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문인들이면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의견을 표했다는 이유로써 고발하는 이 나라의 선관위를 고발해주십시오, 역사와 예술과 대중의 법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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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바보 jire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