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8대 대선의 숨은 패인 중 하나는 대형교회의 세속화(우경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대한민국만큼 종교가 보수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국가는 매우 드뭅니다. 특히 중세의 가톨릭 암흑시대를 연상시키는 대형교회의 세속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자 반종교적 행태의 전형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보수 세력의 5대 축 중에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우경화된 것에는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가 지극히 공산주의적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담을 쌓게 되는 것에는 마르크스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습니다(막스 베버와 토크빌은 생략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승에서의 복종과 순응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보상 방식(하늘나라에 부를 쌓아라)이 노동자 혁명을 가로막는 아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교일치의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리려면 ‘종교는 노동자의 아편’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극대화시킨 것에서 나온 통념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이때부터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되 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을 제멋대로 변형시켜 집권에 성공한 김일성이 종교 탄압을 진행했기에 미국의 기독교(노동과 근면과 절약을 강조하는 청교도가 핵심)를 받아들인 한국의 교회들은 반공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와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기독교처럼 출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물론 이런 현상이 처음부터 심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승만이 그것을 집요하게 추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경향은 강화되기 시작했고 미국식 자본주의 논리가 강화되면서 교회의 보수화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보수화된 대형교회가 출현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진 것이지요. 반공과 자본주의를 양축으로 하는데 어떤 종교가 보수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교회의 대형화로 이어집니다. 유럽을 가보면 위풍당당한 성당들이 즐비하듯이 무릇 신을 모시는 전당은 신의 권능에 대한 현실적 표현인 대형화로 가게 마련입니다. 장대한 자연 앞에 인간이 초라해지는 것처럼. 여기에 신의 명령에 따른 교세 확장과 통치의 수월함을 최대화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이 더해지면 교회의 대형화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들레르는 《낭만파 예술》에서 “교회는...아무도 졸 권리가 없는 약국”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치유를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 우리는 신의 권능을 받들기 위한 교회의 대형화를 찬양하는 목사들의 집요한 설교(헌금과 선교가 핵심. 교인수=돈. 좌파=거악. 성적 타락은 번외로 해도)와 약속 남발에 신자들은 졸 권리조차 박탈된 채 갈수록 자본화되어 가는 교회에 종속되게 됩니다. 돈과 권력 및 성(가부장주의적 교리)에 따른 철저한 계급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만의 거대한 세속화된 리그가 형성되고 자본의 축적과정과 권력의 집중화가 갈수록 강해지며 인간의 구원은 교회의 크기와 교인의 수에 의해 결정되기에 이릅니다. 그런 과정에서 담임목사가 신격화되고, 당연히 세습화가 뒤를 따릅니다. 대형교회의 내부도 철저한 자본주의적 종교의 장식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과거의 권위와 현재의 첨단 제품들이 맞나 온갖 욕망과 탐욕들이 용광로처럼 들끓게 되면 신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 체험의 광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경에 나오는 죄들을 지지 않고 큰돈을 벌 수 없습니다. 자연히 자신의 죄를 사해 받고 싶다는 심리가 종교 지도자에 대한 맹신과 함께 헌금의 크기로 변질되기 일쑤입니다.
청교도 정신마저 사라진 이후에는 대형교회란 세속화와 자본주의화의 상징으로 우뚝 솟아오릅니다. 분배와 평등을 얘기하는 진보좌파의 가치란 철저히 배격해야 하는 악 중의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예수의 가르침은 완벽하게 증발해버리고 자본과 권력 및 가부장주의의 논리(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를 보라)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심할 경우에는 인종적 편견마저 조장하기 일쑤입니다, 모든 예수의 그림이 백인인 것처럼.
또한 목사란 신에게 고용된 자들이란 세금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합니다. 대신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는 엄청난 신도들의 표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치인이야 4~5년짜리 계약직이기에 대형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자본과 권력과 종교가 삼위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에 방송과 군대가 더해지면 우리나라 보수 세력의 5대 축이 완성됩니다.
매우 거칠고 곳곳에서 비약할 수밖에 없는 글이었지만 전체적인 뼈대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은 인류에게 하늘에 있는 별처럼 번성하라 했지만 도시의 하늘에서 별을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하늘에서는, 특히 밤이면 더욱 무성하게 보이는 것이 교회의 십자가입니다. 그중 상당수는 신의 축복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로써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대형교회와 자웅동체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불교가 이에 가세해 온갖 세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정말 종교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나 봅니다. 필자는 천주교 신자(세례명 미카엘)인데 냉담한지가 꽤 오래 됐습니다. 건강 악화가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나마 천주교는 세속화가 덜 진행돼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물론 정 추기경님이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의 신부인지라 최근에는 카톨릭의 현실참여가 많이 약회된 면은 있습니다. 주교회의의 결과에 반하는 말씀도 많이 하셔서 속에서 부화가 치밀기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냉담하는 것에 대한 궁색한 변명거리는 되고 있지만. 최근에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반성과 개혁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원천소득세를 내는 신부와 수녀들은 가정을 꾸릴 수 없는 것이 세속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처럼 보입니다. 무릇 성직이라 함은 세속적인 부와 관계에 노출되면 될수록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부와 핏줄이란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불을 지펴 자신만의 성전을 최대한 키우려는 유혹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성직이란 단어가 그냥 나온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분인지 잊었지만 한국 교회의 타락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 글은 그 분께 드리는 글입니다. 문득 정의구현사제단과 강정마을에서 투쟁하고 계신 강우일 주교님, 민주화의 마지막 보루이자 피난처였던 고 김수한 추기경님이 생각나네요. 김 추기경님은 6.10항쟁의 열사인 이한열 군을 하늘나라로 보낼 때도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뒤에서 추모식을 진행했던 양 신부님도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