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 공식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

Home LOGIN JOIN
  • 사람세상소식
    • 새소식
    • 뉴스브리핑
    • 사람세상칼럼
    • 추천글
    • 인터뷰
    • 북리뷰
    • 특별기획
  • 노무현광장

home > 노무현광장 > 보기

민둥산의 지킴이 ( 수필)

댓글 0 추천 4 리트윗 0 조회 60 2013.01.05 16:06

민둥산의 지킴이

-호미 든 관음 개발성상-

<우리 노짱님>

 

 

 

 

한 손에는 호미 한 손에는 물병을 든 농촌계몽 운동가를 만난다. 거대한 나라 독립을 상징하는 미국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황폐화 된 고장을 살리기 위한 민초들의 현장을 말한다. 식목과 개간으로 헐벗은 산야들을 녹지화하자는 뜻 있는 동지들의 의지가 수십 년이 지난 역사를 오늘에 와서 다시 새겨보게 된다. 흐른 세월만큼이나 무게와 의미 또한 클 수밖에 없는 것도 맨몸으로 이루어내었던 투지가 아닐까싶다.

 

그런 사람들의 정기가 모여 우리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을까. 50년대 사막 같은 민둥산을 푸른 동산으로 태어나게 하였으니 더구나 이곳은 아주 척박한 돌산이 아니었던가. 돌과 바위를 헤집고 심은 나무들을 가꾸기 위해 애태웠을 그날의 열사들이 그려진다. 그것을 대변하고 알려주는 ‘호미든 관음개발성상이, 라는 부처가 오늘날 봉화산의 유래를 말해주고 있다.

 

6.25 전쟁의 상흔이 가득 남아있을 즈음에 사회는 정치적 독재와 보릿고개의 힘겨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따뜻한 등 기댈 곳 하나 만만치 않았던 가난한 민초들은 스스로 개발과 성전을 만들어 의지할 곳을 찾았다. 그렇게 세워진 부처가 오른손에는 물병을 왼손에는 호미를 즉 계몽운동을 상징하는 부처가 바로 ‘호미든 관음 개발성상’ 인 것이다. 물병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일을 하다 목마르고 배고프면 물로서 배를 채우고 호미로는 열심히 이 땅을 개간하라는 뜻이 아닐까. 지그시 눈을 감고 오랜 풍상을 말해주는 자태가 지난 역사를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불교중심으로 전개한 4대 개발을 내 세운 즉 신심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을 상징하는 우리 얼이 깃던 부처를 봉화산 정상에 세웠던 이유는, 이 사회 개혁의 중심에 서자는 뜻이기도 하였다. 부처가 절 밖으로 나와 반드시 민족생존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적 횃불을 밝히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당시 동국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중심으로 불교학도 31명은 자유당말기정권의 부패와 부정으로 얼룩진 시국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가난으로 도탄에 빠지고 권력의 휭포에 굶주리는 체제를 호미로 땅을 고르듯 열심히 갈고 다듬어나가자는 취지로 봉화산을 중심으로 불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곳 정상에 올라서면 30리 밖을 환히 볼 수 있을 만큼 사방이 넓은 시야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듯한 기분이 들게도 한다. 한창 피 끓는 가슴을 지닌 청년들은 금방이라도 새 나라 건설에 착수할 마음이 드는 것은 물론 불심이 자랄 수 있는 자리였다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정말 그런 만큼 관음성상의 호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산사태의 우려를 크게 안고 있든 헐벗었던 봉화산이 녹음으로 우거진 자리를 만들었고 이곳에서 개혁의 선봉대가 되겠다고 외쳤던 진영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노짱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통령이 되어 돌아왔다.

 

관음성상이 세워지던 날 제일먼저 달려와 나무를 심었다는 까까머리 소년은 자신이 진정호미의 주인공이 되리라 여겼을까. 어떤 연장 못지않은 강력한 쇠붙이가 되어 아무리 단단한 돌부리도 기어이 뽑아내는 이 세상에서 제일 큰 호미이고 싶었는지, 근엄한 빛을 담고 있는 부처 앞에서니 대통령의 투지가 더욱 큰 눈빛으로 다가선다.

 

정말 그랬을 것 같다.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간다’ 는 봉하마을의 가난을 등에 업고 그는 이 나라의 한 지도자가 되기까지 수 없는 개혁의 바람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뜯기고 핣퀴어도 맞서야했고 한 끼의 밥을 해결하지 못해 이웃집 문 밖에서 동정의 손길을 구했던 배고픔의 설움을 잊지 않아야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막노동으로 어린 몸을 혹사했던 공사판의 현장은 더더욱 잊어서는 안 되었다. 이런 사실에 가까이 갈수 있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 꼭 법관이 되는 길이라 여겼다. 그래서 힘없는 사람 편에 서서 진정 약자의 아픔을 달래고 함께 나누는 일일 때 가장 민주적인 발판이 되리란 믿음도 가졌다.

 

그는 기꺼이 실천했다.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근로자들을 위해 데모의 선두에 섰고 그들을 위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정신은 곧 청문회스타로 발전했고 최고의 권력자에게 자신의 명패를 던지며 분노를 터뜨리던 기백과 용맹을 보이기도 했다. 어릴 적 호미든 관음성상 앞에서 개혁의 선봉자가 되겠다던 그 약속을 똑똑히 지켰던 것이다. 한 끼의 밥도 구걸 할 만큼 절박했던 시절을 생각하니 수천억이란 국민들의 혈세를 쟁취한 위정자 앞에 터지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을 게다.

 

더구나 자신은 그런 가난을 견디고 온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변론자로서 가난한 법관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는가. 그들을 향한 개혁의 항변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졸음에 지쳐 손가락에 바늘이 꽂히는 줄 모르고 작업하던 어느 미싱공의 눈물을 보았는가? 아빠 없는 자식 세 명을 재워두고 밤새 야간작업으로 삶을 꾸려가는 주부가장을 헤아려 보았는지, 그러다 갑작스럽게 닥친 화마 속으로 자식의 생명을 잃고 오열하는 한 어머니의 슬픔을 기억해본 일은 있느냐? 그가 던졌던 명패에는 이런 국민의 한을 대변하는 소리가 들어있었다. 당신들이 축적해둔 금고에는 억울한 민초들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아라는 듯 그는 그렇게 통분을 터 뜨렸다. 내 자식귀하면 남의 자식 귀함은 당연한 이치임을 그 어버이들의 고충을 살펴본다면 당신들의 호주머니를 그렇게 살찌울 수는 없었을 게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분노는 결국 우뢰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청문회 자리를 지켰다.

 

어쩌면 그는 오늘의 역사적인 명패를 위해 봉화산 정상에 우뚝 섰던 부처 앞에 개혁의 주역이 되기를 맹세하였는지 모른다. 정당한 자리에 정확한 위치를 지키며 꼭 참된 호미의 역할을 하리란 다짐을 30리 밖이 아닌 온 세상을 향해 외쳤는지 모른다. 그 길이 진정 지도자의 길이며 관음성상의 가르침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그렇다 그는 그렇게 하므로 결국 이 나라 지도자의 길을 열었다. 어릴 적 품었던 이상은 헛되지 않았다. 그 옛날 울고 갔던 까마귀도 챙길 만큼 그는 가난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검소함과 소탈함이 더욱 그를 못 잊게 하는 걸까.

 

정상에 우뚝 선 부처가 거룩한 성전으로 다가선다.

 

    2009년 11월

목록

twitter facebook 소셜 계정을 연동하시면 활성화된 SNS에 글이 동시 등록됩니다.

0/140 등록
소셜댓글
솔바람1234 kimsohe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