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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2 11:55
너럭바위
<우리 노짱님>
그곳은 우리의 놀이터이자 식탁이었으며 침대이기도 했다. 과거 어머니들의 종교적인 성전인가하면 조상들의 견고한 무덤이기도하였다. 또는 풍화작용에 의해 갖은 도구의 형태와 모양이 만들어진 자리가 과학적인 연구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행인들의 쉼터로서도 더 없이 좋은 의자역할도 하였지 싶다. 천연석의 성질은 피부에 닿자 이내 시원함으로 땀을 식혀주니까. 그리고 따끈한 햇살을 받았을 때는 영락없는 온돌방도 되었다.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하며 돌덩이가 만들어내는 신비로움에 호기심을 잔뜩 키워가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이런 돌을 두고 우리는 너럭바위라 부른다. 평평하게 생긴 형태는 세상 모든 풍파를 견디고 받은 흔적을 뚜렸이 남기기도 한다. 거친 비 바람에 자기 몸을 패여서 우리인간들에게 상처 난 자리를 역사적 자료로 남겨주던 곳이기도 했다. 성혈(둥근홈)이 그랬고 동물들의 자국 즉 공용발자국이 그랬다. 뿐만 아니라 사람 발을 닮은 유독 큰 자국들은 신선들의 것이라 여기며 그 앞에서 기도하고 경건함에 젖게 하던 기억도 새롭다.
과거 우리들은 돌을 신성시했다. 칠성님도 그곳에 있고 산신령도 이 자리에 앉는다고 믿었다. 어머니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이면 목욕재개 몸 단장하고 정성들인 음식과 촛불을 마련하여 너럭바위를 찾아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러면 일년내내 무병장수 하리라 믿었고 종교의 재단으로서 민간신앙의 뿌리를 내려왔던 곳이기도 하다.
또 동그랗게 파여진 홈은 개구쟁이들에겐 얼마나 재미있는 소꿉놀이장소였던가. 모래 넣은 구멍은 밥솥이라 이름 붙였고 풀잎 찌어 담은 곳은 반찬항아리라 불렀다. 반죽한 흙은 쌈장으로 여기고 나뭇잎은 상추라 부르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놀이에 취했었다.
그랬던 바위가 이제는 이 나라 대통령을 모시고 지켜주는 고인돌로 자리했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이야 당시의 제도이자 풍습이었지만 근대에 정착된 봉분 무덤에서 새롭게 돌로 된 묘를 만난다는 것은 흔하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한 국가의 지도자라면 키 낮은 산을 방불케 할 만치 높은 능으로 자리했다. 그 안에는 왕이 좋아하는 갖은 장신구와 소장품들을 챙겨 넣음은 물론, 살아있는 꽃다운 나이의 여자들을 함께 생매장하는 이해할 수 없는 얄궂은 풍습을 만들어 왕의 저승길에 동행시켰다. 죽어서도 감히 곁에 다가가기조차 어렵도록 권위의 표상으로 남겼던 것이 왕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노짱님은 고작 30센티미터 높이와 겨우 두 사람 앉을 수 있는 넓이의 아주 작은 너럭바위 아래 육신의 여장을 풀었다. 그것도 어릴 적 뛰어 놀던 신작로 가까운 곳에 지금은 차량들의 소음이 잠시도 떠나지 않는 고향집 곁에 안식처를 마련한 것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한창 개구쟁이 시절 함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고 소달구지 덜커덩 그리는 소리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멍멍이가 제 세상인양 뛰어다니고 굵은 빗줄기에 황토 길이 푹푹 파이던 그 길 옆에서 님은 조용히 잠들었다.
그렇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다. 그것도 멀리 떨어진 산이 아닌 동네인접을 선택한 이유도 인간의 좀더 근본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대통령이면서도 서민이고자 했고 정치인이면서도 정의롭고자 했기에 오늘날 자신을 있게 해준 가장 친밀한 곳에서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하려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껏 순결한 영혼을 키워준 고향의 고마움을 지키지 못한 잘못을 속죄하기도 하고, 또 못난 점들을 새로운 각도로 받아들여 개선하고 창조하여 인간 노무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는 꼭 이곳을 지키면서 너럭바위를 통해 키웠던 어린 날의 정서를 기억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태양열에 데워진 온기로 따끈한 구들목 역할을 하던 돌의 신비를 새겨보기도 하고 어른들의 구부러진 허리의 찜질방이 되어주던 그때의 고마움도 깊이 음미해보지 싶다. 비 바람에 또는 어떤 물체에 의해 단단한 돌덩이가 갖은 형체를 만들어내던 신기함은 상상할 수 없는 호기심을 불러오기도 했으리라. 아무리 밟아도 꿈쩍도 않는데 어떻게 한줄기 비에 의해 단단한 바위가 둥근홈으로 패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놀이장소도 만들어주고 동심을 키워가도록 배려하는 자연의 조화가 생각하고 생각해도 그 궁금함을 떨칠 수 없었을 게다.
이제는 그렇게나 궁금했던 일들을 자신이 너럭바위가 되어 모든 것을 대신해주려는 모습이다. 길가는 행인들에게 한 여름날 시원한 의자가 생각나면 기꺼이 자기 곁에 앉았다 가라는 말도 전할 것 같고, 아직도 민간신앙이 종교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성껏 치성을 드려보라는 말도 전하지 싶다. 그의 지극히도 서민적인 생각은 결국 자그마한 바위가 되어 우리 옆에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평소에도 영원한 돌이 되기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돌이 부셔져 마지막에는 흙이 되어 모든 생명을 지키듯 그 모체라고도 할 수 있는 너럭바위를 어쩌면 무덤으로 자처하였을 수도 있겠다. ‘동네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하나만 남겨라.’ 그의 유언에서 나타나듯 세상에 있는 물질들은 희석 또는 소멸 되지만 돌은 영원불변으로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음을 조용히 시사해 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그는 죽어서까지 부패하지 않았다. 진정 부패한사람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 노무현은 자신의 오점과 타협할 수 없었다. 백개 천개를 가진이들이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때 하나의 부끄러움을 진정으로 부끄러워하였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돌이 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 돌이 지닌 속성이 만인에게 전파되어 견고한 정신을 이어가는데 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고인돌의 주인공으로 자처하였을까. 너럭바위의 작은 물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노짱님의 철학이 묻어난다.
그렇다 그는 진정 돌이 되고자 했다. 만물의 근원을 돌에서 찾고자 했고 그 돌과 함께 영생을 누리고자 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영원불변한 돌과 같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영원한 돌과 같은 세상을 말이다.
2010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