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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에서 의인을 보다.....

댓글 1 추천 4 리트윗 0 조회 32 2012.12.21 21:42

정신 줄을 놓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한동안 맨붕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벌써 몇일이 지났건만 아직도 가슴은 먹먹하고 가슴속에는 큰 짐이 들어와 앉은 것처럼 못내 불편하다. 충격적인 대선 결과를 보며 충격에 빠져 있다가 이제는 내 스스로를 추스르고 위안 삼을 일을 찾아 보듬어 보자며, 이후를 정리하는 일기를 남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지만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이미 한 두 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이제는 제법 내공이 쌓일 법도 한데 자꾸만 판단력이 흐려지며 사람조차 멍청해진다.

 

반역의 현실을 묵도하는 것은 커다란 고문이자 충격이었다. 투표율도 높은데다가 그동안 선택할 자가 없다며 한 번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아들 녀석이 이번에는 제 스스로 투표했음을 전하는 문자를 보며 이제는 무언가 달라지리라는 일말의 기대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 대한민국의 양심과 이성의 시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었다.

 

 

오랜만에 올라온 아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아들 녀석은 다른 이가 켜놓은 TV에 자꾸 눈길을 떼지 못하며, 선악구분이 너무도 분명한 이 배반의 현상에 대해, 정의가 뒤집히는 역의 선택이 펼쳐지는 이 처참한 현실에 대해 몹시 서운해 하며 허망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말없이 소주잔만을 응시하며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나 역시 인간이성이 뿌리 뽑히는 이 부조리한 것들에 대해, 이를 합법화 시켜주는 이 대한민국의 정신세계를 어떤 합리성이나 이성과 감성의 체계로도 끝내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현실이 야속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람들에 분노했다. 초등학생조차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선악관계에 오히려 역을 선택해버린 대중의 어리석음과 위선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정치란 자신의 이해와 정신세계가 동질임을 증명해 보이는 사회관계의 증명이다. 일부에서는 반칙의 손을 준 사람들의 가장 많은 수가 농어촌 종사자, 주부였다는 자료를 예를 들어 그들의 무지를 꾸짖지만, 지금은 21세기 그것은 결코 합리적 이해와 설득력으로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아들의 안타까움을 지켜보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혹시 그들은 오히려 반칙과 특권이 자신들에 유리한 것이라 판단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들도 반칙과 특권을 행사하기도 하면서 아직도 맑은 물에서는 고기는 살 수 없다는 수구 이데올로기의 가르침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점차 살점이 익어 제 죽을 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따뜻한 맛에 불판위에 올려진 개구리의 우화를 잊은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부조리에 눈을 감아준 자신들의 순서는 맨 나중이 될 것이라는 기대로 행복한 우월감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에게 반칙과 특권의 손을 들어주게 한 것일까,

 

 

인간 욕망에 대해 단계가 있음을 주장한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의 욕망이란 선천적인 것이며, 욕망은 그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5단계로 분류되며, 인간의 욕구는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되어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그리고 그의 이론중 가장 저급한 것은 인간이 먹고 자고 입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말한다고도 했다.

매슬로우가 주장한 먹고 자고 입는 생리적 욕망(Physiological Needs)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생물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21세기 먹고 자고 입는 문제는 아직도 모든 인간이 누리지 못하는 기본적 욕망인 동시에 이 자본의 시대에는 인간이 더 가지려는 원초적 욕망에 불을 당기는 도화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욕망에 눈이 어두운 자들은 오직 자신의 1차적 욕망 증대를 위하여 타인의 고통에는 눈을 감고 반칙이든 특권이든 부의 축적이든 자신이 행한 도박의 결과에 흐뭇해하지만 결국은 사회 전체의 평등과 인간성의 근간을 뒤 흔든다는 것을 잊는다. 사람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뒤따라야 하지만, 이런 동물적 접근이나 상상도 이제는 모두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카뮈」의 단편,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가득 찰수록 이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는 믿음을 증명해보이고자 한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으로 이전의 것들과 현재의 결과를 판단하며, 진실의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드러난 결과만이 모든 걸 대변하는 것이라 단정해 버림을 말이다. 카뮈가 뫼르소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한 인간허위의식과 부조리한 사회구조도 어찌보면 이 시대의 위선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키워드로 읽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있을 것이다.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감당하지 못할 허위의식이나 일말의 어떤 기득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눈꼽만하게 남은 그 허위의식으로 그것을 쥐고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시즘에 짓밟히는 것을 묵도하고 특권과 반칙과 욕망의 시대를 그대로 읽어야 하는 것은 참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의 정체성은 그 국민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번 대선 결과는 나치 선전장관 괴펠스가 말한 식민지 인간군상의 세가지 부류 중 파시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저들이 가져갔음을 말하는 것 일게다.

 

 

、대한민국에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인가、 라는 현재형의 물음은 쓰라림이다. 하지만 패배에 슬퍼하지도 분노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대자연과 역사라는 긴 호흡으로 보면 이제 시작이라는 하나의 방점을 찍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래 희망의 씨앗들이 슬퍼하는 것은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이 슬픔과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보다 가깝게 다가서는 일이며, 그것 역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인간 성찰과 자기극복 과정중 하나이리라...

 

 

창세기 19장 24절에는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서 유황의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것을 다 멸하셨더라...." 라는 대목이 나온다. 특권과 반칙 그리고 탐욕과 위선에 눈 먼 이 시대, 쓰라림 속에도 소돔과 고모라의 교훈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는 마지막 남은 10명 이상의 의인들이 있다. 오직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평등과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평화의 노란 물결을 만든 사람들이다.

 

 

권력을 쥐거나 금전적 보상이나 대가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나, 혹한의 겨울을 향해 일상의 안락함을 박차고 나와 그들로 하여금 노란 물결 속으로 붙잡아 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면, 자신의 작은 희생으로 다른 이들에 따뜻함이 되고, 대한민국 전체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이들이 따뜻한 바램이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희망이 분명하다는 것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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