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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0:40
향후 대한민국의 5년을 책임지는 제 18대 대통령을 뽑는 대선정국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는 지금 우연히 후보자들을 검색해 보다가 눈에 띄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문재인 야권단일후보가 국내 최대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 'MLB 파크'에 올린 글인데 본인 스스로 야구매니아 임을 자처하며 "변호사시절 지금은 고인이 된 전설의 투수 최동원선수가 선수 권리를 위해 선수협의회 구성을 외치다 구단 눈 밖에 나서 힘겨운 시간을 보낼때 미력하게나마 법률적 도움을 드리기도 했다"라는 내용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최동원이라는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는게 정신이 없어서 인지,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감히 내 따위가 언급할 수 있는 자격이나 되는지 아니면 그 이름을 떠올리면 그가 살다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남긴 그의 큰 발자취에 걸맞게 그를 대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에게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한동안 그를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야구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이 땅에서 살고있는 우리 모두는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살고간 짧은 생애는 우리를 비추는 큰 빛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 앞길을 환하게 밝혀 줄 것이다. 그가 보여준 리드쉽은 리드쉽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그 전형을 보여 주었으며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요소를 그는 그의 인생을 통하여 이미 보여주었고 그것이 현재 그가 그리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를 야구장에서 3번 만났다. 처음 본 것은 그가 78년 연세대 시절 동대문 운동장에서 치러진 연고전에서 무쇠팔뚝을 자랑하며 호쾌하게 강속구를 뿌리며 타자를 유린하던 그의 전성기 시절이었고 두번째는 90년 LG트윈스와의 코리안시리즈 1차전에서 13-0으로 승부가 이미 결정 난 8회초 삼성의 패전처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와 연습타격을 하는 듯한 타자를 상대하던 한물간 퇴물투수 취급을 받을 때였고 마지막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2011년 9월 30일 사직구장에서 생전에 하지 못한 그의 등번호 11번의 영구결번식및 추모경기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와의 3번 만남은 모두 그의 야구인생에서 극적인 순간들이었다.
그는 어느 봄날 푸른 햇살 만큼이나 극적이고 화려하게 우리 앞에 등장했다. 경남고 1학년때인 1974년 그해 봉황기 우승및 황금사자기 준우승팀인 강호 대구상고와 맞붙은 우수고교야구대회 패자결승전에서 7회 구원등판해 3-1로 승리를 지키며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후 이듬해인 1975년부터 놀라운 연투능력을 과시한다. 2학년이 된 최동원은 1975년 8월4일 화랑기 준결승전에서 대구상고를 맞아 5-0완봉승을 거두었고 그 다음날 치뤄진 경남상고와의 결승전에 등판해 14회까지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우천으로 인해 8월8일 치뤄진 재경기에서 아깝게 2-1완투패를 당한다.
분루를 삼킨 후 심기일전한 그는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의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같은해인 1975년 우수고교야구대회에서 첫날 치뤄진 준준결승전에서 그해 청룡기와 봉황기를 우승한 당시 고교야구 최강 경북고를 맞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다. 그 다음날 준결승전에서 다시 등판한 최동원은 선린상고를 상대로 단 2안타만 내주고 삼진을 11개를 잡아내 2-0 완봉승을 거둔다. 놀라운 것은 이틀동안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76년 청룡기 승자결승에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맞아 탈삼진 20개를 뽑아 1956년 고철호(인천고)가 갖고 있던 전국대회 한경기 최다 탈삼진 19개의 기록을 깨며 9-1완투승을 거두고 이틀후 최종 결승에서 다시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군산상고를 맞아 2안타만 내주고 탈삼진 12개를 잡으며 5-0완봉승을 거둔다. 4경기 모두 완투해 42이닝 1실점이라는 괴력을 발휘하며 초고교 투수로서의 명성을 날린다. 아무리 야구가 투수놀음이라고는 하지만 최동원은 이때부터 그가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언제 어느 때고 마운드에 등판했으며 몸을 혹사하는 대가가 어떠한지 불보듯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몸을 사리거나 출격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일단 마운드에 올라가면 그 경기는 반드시 책임을 지고 내려왔다.
최동원의 전성기는 대학에서 꽃이 핀다. 아무리 철완이라도 고교때 그정도로 혹사 당했으면 어깨가 망가지고 내리막 길을 걸을 법도 한데 오히려 대학때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150Km를 웃도는 불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낙차 큰 커브, 두둑한 배짱은 아무도 그가 최고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내가 그를 연고전에서 보았을 때는 마운드에서 그 유명한 금태안경과 스타킹 줄을 연신 만지작 거리며 빨래줄같은 강속구를 던지다가도 잠자리 같이 느린 슬로우 커브를 던지며 칠테면 쳐보라는 듯이 타자를 마음대로 농락하고 있었다. 그때 동대문운동장에는 5월의 푸른하늘에 젊음과 낭만이 가득차 있었으며 관중들은 이미 승부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봄날 최동원은 눈부시게 푸르렀고 그의 무대는 화려함으로 빛났다.
대학시절에 그의 성적은 놀라움 그 자체다. 연세대 1학년에 입학한 최동원은 1977년 대학야구리그 결승에서 성균관대와 맞붙어 30명의 타자를 상대로 탈삼진 16개를 잡아내고 4-0완봉승을 거두며 우승을 한다. 그해 춘계리그에서는 10승 1무 무패의 성적으로 우승했고 그해 추계리그 뿐만 아니라 대학야구선수권까지 제패해 4관왕이 되었다. 이 당시 한양대는 대학 최강으로 장효조, 김일권, 허규옥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다.
2학년 때인 1978년 그는 최고의 시즌을 맞는다. 대통령기 쟁탈 제12회 전국대학야구 준결승전에서 임호균이 버틴 동아대와 3시간 20분 동안 완투를 하고도 14회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그 다음날 속계된 경기에서 다시 선발등판해 18회에 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1-0신승을 거둔다. 몇시간 뒤 벌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전에서 또다시 선발로 등판해 3-2완투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 4경기를 모두 선발등판해서 4경기 모두 승리투수가 되었음은 물론 42이닝을 던지는 동안 27이닝 연속무실점을 포함해 33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총144명의 타자를 상대로 16개의 안타만 허용하고 삼진은 49개를 탈취해 3명에 1명 꼴로 삼진률이 무려 0.340이고 42이닝동안 2자책점만 내줘 0.429의 방어률을 기록했다. 최동원이 철완이라는 것은 만하루 동안 27이닝을 던져 92명의 타자를 상대로 375개의 공을 던졌으며 12안타에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것이다. 연세대 시절 그는 23연승을 포함해 총 123경기에 출전해 방어률 1.62을 기록했다. 이것은 거의 매일 연투한 것을 감안하면 초인적인 기록이다.
이 정도면 무쇠팔이나 불세출이라는 수식어도 그에게는 부족하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흔히들 선동렬을 최동원과 많이 비교를 하는데 5살이나 어린 선동렬은 고교와 대학에서의 성적은 비교 불가다. 아예 비교 자체가 무색하다. 80년 광주일고 3학년이었던 선동렬은 에이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발로 등판한 투수는 2학년 차동철이었다. 강팀인 광주상고, 선린상고, 천안북일고와의 경기에서 차동철이 선발로 등판하고 계투로 선동렬이 나오는 투수 로테이션을 운용했다. 고려대 시절 선동렬은 박노준이나 양상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선동렬이 무너지면 이들이 수호신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연세대에는 윤학길이 있었고 동아대에는 김동수가 있었으며 건국대에는 선동렬의 1년 후배인 에이스 차동철이 있었다. 대학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82년 춘계리그에서 4승을 하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일전 선발등판해 한대화의 3런 홈런으로 역전우승해 그 가능성이 보였으며 대가가 보장된 프로에 와서 비로소 만개하였다. 고교와 대학에서 이미 대한민국 부동의 에이스로 우뚝 솟은 최동원과는 대조적이었다.
81년 최동원은 실업팀 롯데에 들어가 시즌 35경기중 23경기에 선발등반해 17승1패 다승, 삼진 1위를 해 그해 최우수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다승 2위와는 이닝수가 거의 배 차이가 난다. 세계대회로서는 1977년 제3회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회에 출전해 한국야구가 처음으로 세계정상에 오르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이로 인해 매이저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으로 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병역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1년 캐나다에서 열린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에서 캐나다를 상대로 9회 2사까지 퍼팩트로 막아내 대회 최우수상을 받고 캐나다 연고의 매이저리그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입단제의를 받았으나 역시 병역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국내 최초의 메이저리거 꿈을 접어야 했다. 아마추어에서 그가 쌓아온 기록은 앞으로도 좀처럼 깨지기 힘든 기록이 될 것이다.
140여년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도 절대로 깨지지 않은 기록이 2개 있다. 바로 사이영의 511승과 조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안타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깨질수 없는 기록이 한국야구에는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바로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혼자 작성한 4승1패의 기록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2001년 랜디존슨(애리조나)등 7명이 월드시리즈에서 3승을 따냈지만 투수 로테이션이나 연투능력을 감안하면 4승은 절대 불가능하다. 최동원이 생전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박영길 당시 삼성의 타격코치의 말을 인용해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소개한다.
"1983년 중반에 내(박영길)가 롯데감독을 그만둔 후 이듬해 삼성에 타격코치로 갔는데 1984년 가을 광주에서 코칭스탭회의를 했는데 어느 팀을 한국시리즈 상대로 고를 것이냐였지. 난 롯데는 하지말자고 했지. 왜냐하면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기 때문에. 내가 롯데에 있어봐서 아는데 김시진에게는 없지만 최동원에게는 연투능력이 있다. 오늘 던지고 내일 또 던진다. 시리즈에 최동원은 최소 3승은 올릴수 있다. 그러니 OB나 해태로 하자. 그러나 김영덕감독은 OB와는 삼성으로 이적할 때 감정싸움이 있었고 해태는 타선이 무섭다. 결국 롯데로 정해졌고 9월22/23일 롯데와의 마지막 페넌트레이스에서 저주기 게임이 나왔다. 시리즈가 시작되자 나는 삼성타자들에게 3회까지는 무조건 기다려라. 구단에 얘기해서 연봉깎기는 일은 없도록 할테니까 삼진이든 땅볼이든 당해도 좋으니 무조건 기다려서 최동원이 많이 던지게만 해라. 그러면 7회정도 되면 지칠 것이고 그때를 노려서 몇점나게 되면 롯데는 타격이 약해서 최동원은 그경기를 버리게 되고 롯데도 다음경기를 생각해서 최동원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한국시리즈는 그게 통하지 않았지. 그날 완투하고도 다음날 또 던질 각오로 던지는 넘이니까....
그해 만약 삼성이 우승했다면 야구라는 건 그냥 센놈이 약한놈 갖고 노는 경기로 인식했을꺼야. 그런데 그해 롯데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면서 결국 야구라는건 붙어봐야 아는 일이 되어버린거지. 그기다가 나쁜놈이 응징당하는 드라마까지 만들어 졌으니. 그게 바로 한국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고 온 요인이 된거지." (롯데자이언트때문에 산다/김은식저)
최동원은 프로야구 통산 8년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 2.46의 비교적 평범한 성적을 남겼다. 그도 인정했듯이 프로에 올때는 어깨를 혹사한 대가로 이미 전성기가 지나 있었다. 다만 선발 124경기중 80경기를 완투해 프로야구에서도 여전히 철완임을 과시했다. 이 부문 1위는 윤학길로 선발 231경기중 100회를 완투했다. 이 기록과 비교해도 최동원이 얼마나 몸을 사리지 않고 완투를 많이 했는지 알 수 있으며 최동원보다 선수생활을 훨씬 오래한 선동렬도 완투는 통산 68회 밖에 되지 않는다. 1983년 롯데에 입단후 선수회 문제로 시끄러웠던 1988년을 제외한 5년동안 그는 매년 2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우승을 했던 1984년 페넌트레이스 100경기중 51경기에 나와 27승을 거두었고 이어진 한국시리즈에서는 혼자 5경기에 출전해 4승을 거두고 40이닝을 혼자 던졌다. 6개월 동안을 두경기 중 한경기 꼴로 출전한 것인데 이것만 보더라도 최동원은 공던지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마운드가 그기 있으니까 무조건 던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1경기를 위해서는 선동렬을 택하지만 1시즌을 위해서는 주저없이 최동원을 선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최동원이 프로야구에서 또한번 불멸의 기록을 세울 뻔 했으나 1보 직전에서 좌절된 것이 바로 3년 연속 한시즌 20승 달성이었다. 지금은 한시즌이라도 20승을 달성하는게 하늘의 별따기지만 최동원은 84년 27승, 85년 20승을 달성했고 86년 19승에서 마지막 OB와의 경기에 출전해 3년연속 20승을 노렸으나 아깝게 9회 역전패를 당해 그 기록을 놓쳤다.
그해 겨울 최동원이 주축이 되어 선수협의회가 발족된다. 7개 구단 140명이 모였고 이 자리에서 최동원은 선수회의장으로 선출된다. 그 당시 최동원의 연봉은 1억이었지만 선수들의 평균연봉은 600만원에 불과했다. 최동원은 그 당시 구단과 마찰만 이르키지 않았다면 연봉과 선수생활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도 있었으며 부산에서의 지도자라는 화려한 앞길도 열려 있었다. 굳이 본인이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하나 최동원을 원망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가시밭길을 택했다. 북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 들판 한가운데 서서 홀로 발가벗겨진 체 순교자가 되어 거대한 조직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무모한 싸움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롯데시절에 어느날 70대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와서 사인해 달라고 하는데 그 할아버지도 젊은 시절에 선수였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며 우리 선수들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밥값도 안 되는 연봉을 받는 선수가 많았는데 이들도 프로가 뿌리 내리는데 공헌한 사람들이다. 내가 잘나가는 것도 결국은 다른 선수들의 공이다. 그래서 잘나가는 내가 선수협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결국 이 때문에 88년 11월 삼성으로 방출되었고 잠실운동장에서 벌어진 1990년 한국시리즈 LG와 삼성 1차전에서 낙엽처럼 지는 최동원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청춘의 한켠도 무너져 내림을 느꼈다.
삼성에서 방랑자처럼 뜻없이 떠돌던 대구생활을 접고 파란만장하고 화려했던 20여년의 불꽃같은 그의 선수생활을 마무리 할때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은퇴식을 치러 주지 않았다. 최동원으로 인해 그 동안 해택을 누렸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외면했다. 롯데에서도 그를 외면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리고 그가 달려간 곳은 놀랍게도 꼬마민주당이었다. 1991년 초대 광역의회 선거에서 그 당시 김영삼의 3당 야합에 반대해 노무현, 김정길등이 이끄는 누가봐도 승산이 없는 꼬마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한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해 편한 민자당의 제안을 뿌리치고 그 자신도 당선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김영삼의 지역구인 서구에 가서 장렬히 낙선한다. 왜 그는 쉬운길을 마다하고 번번히 어려운 길을 택할까. 그것이 최동원 방식의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한 방법일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끝내 얘기하지 않은 그의 아버지와 함께 꾸려고 했던 그 꿈은 무엇일까. 그의 아버지 삶의 전부인 최동원이 저 세상에서 이땅에서 이루지 못한 그 꿈을 아버지와 함께 가꾸어 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 모두는 최동원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야구를 몇단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칫 침체되었을 수도 있는 프로야구를 온몸을 불살라서 구해낸 일등공신이다.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명예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영구결번 되었다고 끝난 것도 아니며 사직구장의 한쪽에서 그의 등번호가 깃대에서 나부낀다고 그에 대해 할일을 다한 것도 아니다. 그가 온몸을 던져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그의 진정성을 이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그에게 보여줄 차례다.
최동원, 그는 이 땅을 살다간 이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