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 상황의 니체적 관점> 문-안이여! 그대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우리 민중들의 인간적 존재를 빛나게 존재하게 하라!!
우리는 니체가 동물원 극장(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에서 가장 먼저 낙타를 구경시켜 준 것은,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묵묵히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선량함은 인간 중심적인 것에서 본 판단일 따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낙타는 어리석은 고통을 한없이 감내하는 짐꾼에 지나지 않는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짐깨나 지는 정신에게는 참고 견뎌 내야 할 무거운 짐이 허다하다. 정신의 강인함, 그것은 무거운 짐을, 그것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자 한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나타처럼 무릅을 꿇고 짐이 가득 치길 바란다. 너희 영웅들이여, 네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써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그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저 더없이 무거운 것, 그것은 무엇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묻는다. ********* 짐깨나 지는 정신은 이처럼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진다. 그러고는 마치 짐을 기득 지고 사막을 향해 서둘러 달리는 낙타처럼 그 자신의 사막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짐깨나 지는 정신, 철학자는 그것을 낙타라고 말한다. 낙타는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르는 정신이다. 어떤 불의한 명령 앞에서도 그들은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굴종한다. 그들은 노예의 도덕을 내면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유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노예이고 천민들이다. 그들에겐 애초부터 주인이 되려는 의지가 없었다, 주인이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전부 거는 모험을 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그런 모험을 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일견 그들은 약해 보인다. 그들은 항상 약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을 혐오하고 그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낙타형 인간과 반대되는 유형이 디오니소스형 인간이라고 말한다. 삶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자인 디오니소스적 신과 인간은 두렵고 의심스러운 외양뿐 아니라 두려운 행위, 그리고 파괴, 해체, 부정의 모든 호사도 자신에게 허용한다. 생산하고 결실을 맺는 충만한 힘, 어떤 사막도 옥토로 만들 수 있는 충만한 힘의 결과로 그에게는 약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도 모두 허용한다 (즐거운 학문, 니체).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삶의 충만한 힘을 만끽할 뿐 아니라 파괴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울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악한 것, 부조리한 것, 추한 것조차 하나의 수단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이 사막을 풍성한 옥토로 만드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은 자들이다. 그들은 기존의 도덕에 피동적으로 순응하는 자들이 아니라 제 삶을 위해 새로운 도덕을 창조하는 자들이다.
낙타형 인간은 겨우 존재하는 자들이다. 겨우라고? 그렇다. 겨우 존재하는 영역에 속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기조차 하다.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짐깨나 지는 정신은 그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릅을 꿇고 짐이 가득 실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지 않는다. 왜냐하면 견디며 살만하니까 그들은 웃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웃을 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삶은 최소주의로만 주어진 것, 이를테면 하나의 무거운 의무, 거역할 수 없는 강령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죽음을 면제받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삶도 면제받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존재함에 만족한다. 이 말은 존재의 보존과 지속성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는 명사적 형태의 존재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명사적 형태의 존재란 '존재한다'라는 동사적 측면이 망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으로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존재란 명사적 형태 속에서조차 하나의동사적 사건이다. 따라서 동사적 형태로 표현되는 생성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란 생성의 한 측면이고, 생성의 다른 이름이다. 생성이 없는 존재란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다. 낙타형 인간 속에서 가족 부양이란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아침 일어나 직장으로 출근하는 범속한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불가피하다.우리는 날마다 살아 있지만, 자기 삶을 바꿀 엄두는 도무지 내지 못하며 창조적인 번개의 웃음을 잃고 살아가는 본질에서 죽은 자들이다. 그것은 창조가 없는 삶이다. 창조,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겨우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낙타, 그들은 힘들고 무력하고 침울하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들을 약하게 하고, 부조리 하고, 추하게 만드는 무엇이었다. 바로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권 10년은 우리 민중에게 짐깨나 지는 삶에 천착하게 한 친일, 반공, 독재 정권들의 이념의 조작과 강화에 의한 중세의 잠에서 우리를 깨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문재인이여! 안철수여! 우리가 다시 저 중세의 무한 침묵의 낙타의 짐깨나 지는 침묵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 민중들에게 디오니소스적 삶을 존재하게 하라! 우리 민중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으로 달려가기 전에 왜 우리는 낙타일 수밖에 없는가를, 왜 우리는 삶의 충만한 기쁨과 꿈을 잃고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잃어버렸는지 깨워라! 둘이 죽을 힘을 다하여 우리 민중의 인간적 존재를 빛나게 존재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