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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17:34
한 번 보는 것이 안 보는 것보다는 좋지만,
두 번 보는 건 또 다르다는 말씀 잊지 않을께요.
김휘 (뉴스매거진 팀, 작가)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였다. 햇볕이 있어도 바람이 차가워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낮 12시. 백화점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몇몇 노숙자들은 골목 인도에서 잠을 청하는데 행인들은 익숙한 풍경인 듯 그저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다. 지난 11일 목요일 영등포역 주변 모습이다.
영등포역 파출소 골목을 따라 50여 미터 가면 큰 천막을 만나는데 바로 이곳이 하루 세 번 무료급식을 해 주는 곳이다. 이날 김정숙 씨는 무료급식 봉사에 참가하기 위해 편안한 차림으로 이곳을 찾았다.
천막 안은 급식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이미 빈자리가 없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광야교회에서 1987년부터 후원금을 받아 영등포지역 쪽방주민들과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해 주고 있는데 지금은 영등포 지역 뿐 아니라 수도권에 있는 노숙자도 찾아와 식사를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영등포역이라는 지역적인 편리함도 있지만, 하루 세끼 모두 무료급식을 해주는 곳은 드물기 때문. 이곳에선 하루 세끼 무료급식이 이루어지는데 한 끼에 400여 명이 식사를 한다고 한다.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김정숙 씨도 함께 했다. 사람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을 뿐 여느 때처럼 반가운 인사도 생략이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따뜻한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 순간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말이 많이 필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밥을 먹고 잔반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김정숙 씨 역시 말을 아꼈다. 대통령 후보 부인, 누구 아내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맡은 반찬 담는 일을 열심히 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바로 그것인 것처럼.
12시 10분부터 시작된 무료급식은 1시 30분에 끝이 났다. 김정숙 씨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인사를 한다. 식사를 끝난 이들은 문 후보의 아내라는 소개에 따뜻한 박수를 보내줬다. 광야교회 임명희 목사는 “문 후보는 소통을 잘 할 수 있는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세 후보 중 약자의 아픔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죠. 아파 본 사람만이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날 일정은 김정숙 씨가 꼭 가야 한다고 강조해서,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정은 조용하게 진행됐다. 무료배식 봉사가 끝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서 김정숙 씨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온 남편은 물론 저도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선거활동을 하고 있어요. 경선후보 때 이런 곳에 오면 너무 앞서간다는 느낌을 줄 것 같았죠. 대통령 후보가 된 지금은 이제는 가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문화가정부터 소외계층을 계속 찾아가려고 노력중입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찾아온 걸 이쁘게 봐주셨으면 해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이런 마음을 꼭 지켜나가고 싶습니다.”
무료급식을 끝내고 찾아간 곳은 부근에 있는 쪽방촌. 성냥갑처럼 작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다. 예전에 비해 쪽방촌은 깨끗했다. 대문 앞에서 오후 햇볕을 쬐고 있는 노인들, 늦은 점심을 준비하는 사람, 이웃과 함께 김치를 담그는 사람 등, 집이라는 공간의 크기만 다를 뿐 여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에는 총 9개 지역(돈의동, 창신동, ****5가, 회현동, 동자동, 갈월동, 영등포1, 2동 문래1동)에 쪽방촌이 있는데 이곳 영등포 쪽방 지역은 거주자의 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540세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거주민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노인이며 70% 정도가 기초생활 수급자다. 매월 조금씩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 액수가 턱없이 부족해 월세는 꿈도 꾸지 못하고 하루하루 돈을 내는 ‘일세’로 살고 있는 주민도 있다고 한다.
이날 김정숙 씨가 방문한 가구는 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를 서로 피해야 할 정도로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러 가구가 마주보고 있는 ‘벌집’ 중 한 곳이었다. 방문 하나가 한 세대인 셈. 샤워나 설거지를 할 수 있는 수도 시설은 단 한 곳, 8가구가 함께 사용한다. 평균 0.8평의 방이 집이자, 부엌이었다.
이곳에서 김정숙 씨는 올해 아흔셋의 나병훈 할머니를 만났다. 평양이 고향인 할머니는 31살에 가족과 떨어져 친구들과 함께 피난을 왔다고 한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고향으로 가리라 생각하고 길어야 6개월만 벌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악착같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기약 없이 길어져 6년이 지나… 이제는 강산이 여섯 번도 넘게 바뀐 6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는 서울에 정착을 한 후 결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고 한다.
할머니의 손을 꼭 쥐고 헤어질 때까지 놓지 않았던 김정숙 씨는 시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했다. 시어머니 역시 이북 분으로 일사후퇴 때 문 후보를 데리고 내려왔다고, 할머니의 이북 사투리가 어머니의 말투와 똑같다고…. 그래도 할머니가 생각보다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김정숙 씨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는 어떻게 하는지, 생활의 어려움은 없는지 월동 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신지 꼼꼼히 챙겼다. 최근 서울시가 보일러를 놔줘서 겨울은 괜찮지만 창문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살다보니 여름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필요한 게 없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 나이에 필요한 게 뭐 있겠냐며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몸이 쇠약해져 외출이 어렵다 보니, 이렇게 찾아오는 낯선 사람들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대통령후보가 누군지, 문재인이란 사람이 누군지 할머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집을 찾아와 자신의 안부를 챙겨주는 사람을 기억할 뿐이다. 할머니의 표정, 말 한마디, 손길 하나에는 깊은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피붙이 하나 없이 혼자 먹고 자고 할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일까? 김정숙 씨는 할머니의 곁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했다.
서울 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자선 의료기관인 요셉의원도 살펴봤다. 6천여 명의 후원자와 58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을 하는 요셉의원은 노숙자, 행려자, 알코올중독환자, 외국인 노동자 등 이웃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분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있는 봉사기관. 대부분의 환자는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됐거나 없으며, 호적이나 주민등록상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의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차상위 계층으로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매일 진료과목을 바꿔 병원을 방문하는 노인들도 계신데. 이분들에겐 병을 고쳐주는 의학의 손길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따뜻한 관심도 그만큼 절실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은 가족만큼 따뜻하고 정성이 가득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몸의 병과 함께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셉의원의 이문주 원장신부는 김정숙 씨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귀하신 분을 만나서… 오늘의 기억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겠습니다. 한번 보는 것은 안 보는 것보다 낫지만 두 번 보는 건 또 다르죠. 이런 곳도 많이 신경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었던 김정숙 씨.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각오를 다졌을까?
“남의 집에서 밥을 먹으면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는데 이분들은 매일 그렇게 생활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일자리도 찾고, 원하는 거 빨리 얻어서 배부르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죠. 사회적 책임인데 언제쯤이면 이런 현실이 사라질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나마 애써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분들에게 감사해요.”
여러 만남을 뒤로 하고 다음 일정을 향해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김정숙 씨.
골목이 끝나는 지점의 담벼락에 누가 써놨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그 앞에서 발길을 멈췄을 법한 시를 발견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