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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걸어온 길

댓글 5 추천 5 리트윗 0 조회 577 2012.10.19 21:50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대통령의 참혹한 마지막 모습을 그대로 본 내가 사태 경과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나 자신부터가 밀려드는 자책감을 견딜 수 없는 마당에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상황이 더더욱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장사지내는 상주가 되어야만 했다. 시신확인에서부터 운명, 서거발표, 그를 보내기 위한 회의주재까지, 나 혼자 있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했다. 그렇게 길고 긴 5월 23일 하루가 넘어갔다. 내 생애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만큼 내가 마지막 비서실장을 했던 게 후회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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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이 혼자만의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마지막 결심을 굳힐 때까지 나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함께 있어드리지 못했다. 유서를 처음 본 충격이 어느 정도 가셨을 때 나를 못 견디게 했던 건, 이분이 ‘유서를 언제부터 머리에 담고 계셨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다듬을 수 있는 글이 아니므로 대통령은 아무도 몰래 머릿속에서 유서를 다듬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는 첫 문장은 나머지 글을 모두 입력한 후에 추가로 집어넣은 것이었는데, 그답게 마지막 순간에도 스스로의 유서를 다시 읽고 손을 본 것이다.


 대통령이 마지막 얼마동안 머릿속에 유서를 담고 사셨으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나는 지금도 그분의 유서를 내 수첩에 갖고 다닌다.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그럴 뿐이다. 

 

 

 

그를 떠나보내며


 

 봉하에 마련된 빈소에는 상상도 못할 인파가 밀려들었다. 그 많은 분들이 단 1~2분의 조문을 위해 몇 시간을 달려와 또 몇 시간을 기다렸다. 그 뜨거운 뙤약볕도, 갑자기 쏟아진 폭우도 그 행렬을 흩어놓지 못했다. 장엄한 종교의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거기까지 오게 만들었을까….

 장례문제를 논의하면서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많은 논란을 거쳐 하나하나 결정해 나갔다. 국민장이냐 가족장이냐를 비롯해서 정부 측과의 장의위원회 구성하는 문제를 두고도 여러 차례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영결식 장소, 노제와 운구 행렬의 장소, 장지 등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결정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봉하 내에서 묘역을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국민적 추모의 공간’에 중점을 두고 지금 장소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국민 참여 방식의 박석 형태를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는데 비극의 장소인 부엉이 바위가 빤히 바라보이는 것을 여사님이 영 마음에 걸려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지금의 형태로 완성된 후엔 모두 흡족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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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봉화산 사자바위에서 묘역을 내려다볼 때면, 그 장소가 원래부터 대통령의 묘소로 예정돼 있던 운명적 장소 같다는 생각을 한다. 땅 모양이 삼각형 형태여서 봉화산에서 흘러내린 지세가 수반이 있는 꼭짓점을 접점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인 봉하마을과 절묘하게 연결되지 않는가! 진작 그렇게 예정돼 있던 것일까, 운명의 조화를 누가 알아챌 수 있을까.


 큰 가닥이 잡힌 후엔 정부의 협량한 태도가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서울광장의 노제를 반대했고 만장까지 문제를 삼았다. 시민들의 감정이 격해져 대규모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고 만장 깃대가 시위용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격앙된 민심 앞에 벌벌 떠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영결식을 위엄 있고 질서 있게 엄수하려는 것은 그들보다 우리가 더 원하는 일이었다.


 끝내 정부가 못하게 막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 추모사였다. 내가 그것을 제안했을 때 모두가 찬성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으셔서 하실 수 있을까 염려하면서도 일단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부가 거부를 했다. 그 이유가 참으로 궁색했다. 전례가 없다는 것과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측의 거부로 영결식 추모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영결식 전날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서울역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 말씀을 해주셨다.

“노무현 당신,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해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간절한 추모사였다.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눈물의 바다

 

 영결식은 거대한 슬픔의 바다였다. 나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영결식을 준비하는 며칠 동안 나는 한 순간이라도 내 슬픔을 드러낼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한명숙 전 총리의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는 애절한 추도사를 듣는 순간 봇물 터지듯 눈물이 쏟아졌다.


 이명박 대통령의 헌화 순서 때 분노를 참지 못한 백원우 의원이 ‘정치보복 사죄하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마음인들 오죽했으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는 상주로서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영결식이 끝날 때 국민장의위원회 운영위원장의 자격으로 나는 그에게 사과했다. 이대통령도 “괜찮다. 이해한다. 개의치 마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검찰은 나중에 끝내 백 의원을 장례식방해죄로 기소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였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오열하던 모습을 기억하시리라. 나는 가까이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그 장면을 목격했다. 헌화를 마친 김 대통령께서 여사님을 위로하기 위해 다가와서는 슬픔과 비통함을 못 이겨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얼마 후 김 대통령마저 돌아가시자, 병마가 깃든 노구를 이끌고 오신 것만도 건강에 크게 해가 됐을 텐데 그처럼 마음마저 무너진 것이 어쩌면 그분의 서거를 재촉한 게 아닌가 싶어 죄스럽고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노제를 지낼 서울광장을 향해 운구 행렬이 나아갈 때 수많은 추도 인파로 인해 행렬은 더디고 더뎠다. 평범한 서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운구차에 손이라도 대보려고 안타까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그가 얼마나 서민들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는 50만이 넘는 인파가 함께 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노래 부르고, 소리치고, 함께 울었다. 나는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무대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분위기만 느낄 뿐이었다. 하늘에 신비한 오색 채운(彩雲)이 길게 드리워져 그의 영면을 비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나 애절한 마음이 모이면 그것이 기(氣)가 되어 그런 신비로운 현상을 빚어내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제가 끝나고 다시 운구 행렬이 움직일 때도 시민들이 운구차량을 한사코 붙잡고 또 붙잡았다. 그들의 애절한 마음이 아파서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서울역을 지나서야 비로소 인파와 헤어졌는데 내가 대표로 시민들께 인사를 드렸다. “너무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을 마치고 유골을 수습해 봉하마을 정토원에 모신 건 다음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였다. 자정을 넘기면 안 된다는 속설에 따라 시간을 맞추려 노력했지만 추모인파와 헤어지는 게 그리 어려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국민장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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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자리

 

 노무현 대통령이 모든 번뇌와 시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저 안식과 자유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안장식을 준비했다. 불교계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49재를 지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묘역 조성은 문화예술계의 전문가들이 기꺼이 맡아주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서서 ‘아주 작은 비석위원회’를 구성했다. 유홍준 교수, 역사학자 안병욱, 건축가 승효상, 미술가 임옥상과 안규철, 조경 정영선, 그리고 황지우 시인 등으로 짜여진 드림팀이었다. 그 분들 덕분에 오늘의 묘역이 이렇게 아름답게 꾸며질 수 있었다.


 대통령이 유언에서 밝힌 ‘아주 작은 비석 하나의 정신’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유언은 세상을 떠나는 이의 겸양일 뿐이므로 아주 작은 비석은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되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유골을 안장해 묘소를 만들되 봉분 대신 고인돌 같은 너럭바위 하나를 올려놓고 비석은 따로 세우지 않고 너럭바위에 비명을 새겨 그것이 비석이 되도록 했다. 유 청장의 아이디어였다. 황지우 시인은 묘역 바닥에 갈 박석에 추모글귀를 받으면 그보다 더 좋은 비문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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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장식은 2009년 7월 10일에 엄수되었다. 유골은 백자 도자기와 연꽃 석함에 넣어져 안장되었다. 부장품으로는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와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영상 DVD를 넣어드렸다. 역사가 참여정부를 평가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 토대가 될 다큐와,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증거 하는 추모영상을 하늘에서나마 보시라는 심정에서 그렇게 했다.


 안장식을 치른 뒤 1주기까지 약 10개월 동안은 묘역조성에 전력을 다했다. 1만 8천 명의 시민들이 저마다 추모의 글귀를 새간 박석을 묘역 주변에 깔았다. 건축가 승효상 씨의 구상이었다. 박석 배치는 미술가 임옥상 씨가 설계했다. 

 박석 모집이 시작되자 순식간에 희망자가 몰려 마감이 되자 미처 신청 못한 분들의 원성이 자자해 설계를 바꾸면서까지 박석 수를 늘렸다. 시민들이 새긴 추모문구는 한 줄 한 줄이 감동이었다. 황지우 시인의 말처럼 어디에서 이보다 더 나은 비문을 얻을 수 있을까. 


 나도 아내와 함께 박석 하나를 신청해 “편히 쉬십시오” 단 한 줄을 새겼다. 나는 그분이 대통령 재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게 한스러워 그야말로 안식을 바라는 마음 말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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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례를 모두 마친 후 지속적인 추모기념사업을 위해 봉하엔 봉하재단을, 전국적으로는 노무현재단을 설립해 각각 감사직과 상임이사직을 맡았다.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를 이야기한다.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리 대통령 서거에 대해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단들 그분이 살아 계신 것만 할까. 가끔 꿈에서 대통령을 만나기도 한다. 술을 한 잔 마시면 가끔씩 옛날을 추억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내 인생을 굉장히 많이 규정했다.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이다. 그것이 꼭 좋았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너무 많아서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와의 만남부터 오랜 동행, 이별은 내가 계획했던 것도 아니었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가 남긴 숙제가 있다면 그 시대적 소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물며 나는 더욱 그렇다. 기꺼이 끌어안고 남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길을 돌아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참여정부 인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임기 내내 있는 힘을 다했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생각이 미치지 못한 점이 있었을지언정, 늘 열심이었고 사심이 없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우리는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차분한 성찰과 복기(復棋)가 필요하다. 냉정한 마음으로 성공과 좌절의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또한 그러한 복기는 정권을 운용한 우리뿐 만이 아니라 범야권, 시민사회 진영, 노동운동 진영, 나아가 진보 개혁 진영 전체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때는 모든 것을 ‘참여정부 탓’이나 ‘노무현 탓’으로 돌리고, 노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분위기가 반전 되었다고 성찰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2003년 참여정부 집권 시기에 비해 우리 진보 개혁진영의 역량과 집권능력은 얼마나 향상 되었을까. 진영 전체의 역량을 함께 모으는 지혜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나는 선뜻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우리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보수적 풍토와 여론을 주도하는 강고한 보수 세력이 엄존하는 정치 지형 속에서 진보 개혁진영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혁’과 ‘복지국가’를 정권의 힘만으로 해낼 수는 없다는 사실 -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여정부가 남긴 교훈이라 생각한다. 참여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좌 우 양쪽으로부터 부단한 공격을 받았다.


 내가 이 시점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보 개혁 진영 전체의 힘 모으기에 실패하면 어느 민주개혁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참여 정부 때 실패했던 개혁을 돌이켜 보면 이 사실은 명백해 진다. 국가보안법 철폐, 검찰 개혁,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문제 등등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개혁들은 하나같이 실패로 귀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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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개혁작업의 선두에서 정권을 운용했던 우리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적인 정치지형 속에서 기득권의 저항과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국민의 지지와 동의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이며, 정부는 어떻게 추진하고 시민사회진영은 어떻게 지원하면서 정부를 견인할 것인가, 수많은 개혁 과제들 가운데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시기별로 해야 할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런 의제들에 대해 진보 개혁 진영은 얼마나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문제는 크나큰 아쉬움을 남긴다. 


 다 합쳐도 소수를 넘지 못하는 우리 진영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기는커녕 헤게모니 싸움 속에서 분열하지는 않았던가. 우리 진영의 근본주의가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영원한 소수파로 머물지 않으려면 국가 경영에 대해, 나아가 외교 안보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더 책임 있는 자세를 가져야 했던 것은 아닌가. 조직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전략적 접근을 하지 못한 채 무리한 요구를 거듭함으로써 게도 구럭도 다 놓치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닌가.


 이러한 반성의 토대 위에서 진보 개혁 진영의 모든 역량을 한 데 모아내기 위한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는 통합이 바람직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집권 후를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집권 후에도 함께 힘을 모아 개혁의 동력을 유지해 나가려면 단일화 보다는 더 놓은 차원의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진보적 성향이 다수를 이뤄 진보 개혁 진영 안에서 헤게모니 싸움을 벌여도 대세를 그르치지 않게 될 때까지는 통합된 정당의 틀 안에서 정파 간의 연립정부를 운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운명이다


 

 중학교 1학년 여름, 어느 일요일 새벽 어머니가 나를 깨워 부산역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행여 작은 보탬이라도 될까 싶어 기차표 암표장사를 할 엄두를 내고는 나를 데리고 새벽 같이 길을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어머니는 역의 상황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했을 뿐, 시작도 하지 않고 그냥 발걸음을 돌리셨다. 아침때를 한참 넘긴 시간이어서 몹시 배가 고팠다. 우리 모자는 집 근처에 와서야 토마토 몇 개를 사서 겨우 요기를 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일은 어머니와 나만 아는 일로 남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그냥 돌아왔는지도 몰랐고 더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이번에 이 책을 쓰면서 어머니께 여쭤보았더니 어머니는 “듣던 거 하고 다르데”라고 짧게 대답하셨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때 우리 모자 생각이 난다. 물론 우리는 이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금도 지난 날 우리처럼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과거 어려웠던 시기를 견뎌내는 데는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국가가 가난해서 복지 기능을 제대로 못할 때는 민간이 나서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던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운 시기가 있을 수 있고 그럴 때 국가가 도와 어려움을 견뎌내게 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이것을 제대로 하는 것이 복지국가가 아닌가.


 나는 이런 복지국가의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국민과 더불어, 함께 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표현한 그 정신과 가치는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정신의 축약된 표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치열했던 그는 서거조차 그러했으니, 나를 다시 그의 길로 이끌어 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노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 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다.  

 

 

출처/ http://www.moonjaein.com/his_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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